2011년 《시와 세계》 신인상 _ 권여원
옥상 (외 4편)
권여원
내 신혼의 꿈은 옥상에서 시작되었다
스티로폼 상자에 심은 부추와 과꽃은 철따라 피고
화분 하나는 옥상을 지키는 대문이었다
옥탑방이 할 수 있는 건 하늘을 끌어당기는 일
밤하늘의 별은 붙박이장이고
그믐달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베개였다
대리운전을 했던 신랑은 공복의 저녁도 잊은 채
밤하늘의 귀가를 총총 도왔다
도시의 절반을 헤매고 다닐 남편의 주행거리가
빛의 속도로 쌓여도 내 집 마련의 꿈은 저 별들처럼 아득했다
시어머니는 종종 아이 소식을 물었지만
벼랑처럼 흔들리는 옥상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나는 밤마다 마이보라*를 챙겨먹었다
남편이 도시의 불빛을 잠재우는 동안
늦게까지 구슬을 꿰며 시간을 굴렸다
새벽 고단한 잠을 겨우 눕히면
옥상으로 몰려온 바람이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그해 겨울, 가파른 언덕을 넘으며
우리는 맹물에 별을 녹여먹었다
바라보면 아슬한 옥상에서 두 해를 견디다
낮은 곳으로 내려온 나는
그때부터 마이보라를 던져버릴 수 있었다
————
* 마이보라 : 먹는 피임약
쇼생크탈출
나는 유채밭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바람에 업혀 건너편 맨홀 구멍에 내려앉았다 내 등뼈엔 나비의 날갯짓과 장다리꽃 가득한 사월의 하늘이 새겨져있다
어둠을 베고 자다가 흐르는 물소리에 목을 축이자 실핏줄처럼 하얀 뿌리가 돋았다 맨홀을 꼭 붙잡았다 흐르는 물길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하수도 뚜껑으로 떨어지는 달빛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내가 태어난 곳을 향해 키가 한 뼘이나 늘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몸속에 고인 기름이 조금씩 새어나갔다
어둠을 털어내고 흘러온 모래로 둔덕을 만들며 까치발로 바깥을 넘보았다 한줄기 빛을 찾아 맨홀 구멍으로 대궁을 밀어올리자 눈부시고 목마른 세상이 보였다 햇살이 목덜미에 닿자 노란 꽃이 터졌다
봄볕에 그을린 얼굴을 아슬아슬 스쳐가는 바퀴들 다시 맨홀을 붙잡는다
숲속의 빈방
숲속의 목수 큰오색딱따구리 맞은편
나뭇가지의 속도와 잎맥의 넓이를 예측하고
허공의 각도를 잰다 지붕도 대문도 없는 집
잎사귀를 끌어와 발치고 빗발을 막을 것이다
나무의 둘레를 재고 지름을 긋고 구멍을
파는 순간, 부리는 시속 20km 깎기망치가 되고
드릴이 된다 나무의 등뼈가 시려오고 나이테가
흩날린다 저 노련한 목수에게도 복병은 있다
속을 보이지 않는 단단한 비자나무를 만나
부실공사에 빠지기도 했다 며칠 전
공사를 마친 구상나무, 미루나무 빈방에
지빠귀와 박새가 터를 잡았고 키오롯 키오롯,
노래 한 소절로 등기를 마쳤다 새끼
지빠귀들이 자라 너른 세상으로 날아가면
나무들은 메아리처럼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다
쉽사리 빈방이 채워지지 않는 숲
아침마다 장수벌레가 맨발로 올라가 전망 좋은
빈방을 들락거린다 가을이 오면 낙엽 전단지를
날리며 다음 분양을 알릴 것이다
볼트와 너트
뚜껑 나이트로 오실래요? 물때처럼 하루에 두 번 뚜껑이 열릴 때 당신의 머리 위로 건너온 노을이 통째로 떨어지고 은하수가 쏟아져요 사이키조명이 천정을 향해 방아쇠 당기면 허공을 찢는 박수소리 동그랗게 잘린 밤하늘은 가벼워져요
살다가 팔팔 뚜껑이 끓어 넘치던
접시머리볼트, 무드머리볼트, 둥근머리볼트 별을
따겠다고 덤벼드네요 레이저 빛에 광분한 늦은 밤
그동안 뚜껑을 닫고 살던 나도 이곳에 오지요
머리 뚜껑이 열린 K씨는 병실에 누워 있어요
마음을 닫고 살다가 짓눌렸던 뚜껑이
폭발했나 봐요 이제 당신 브래지어를 풀 듯
가슴을 열어봐요 3번 테이블 아가씨는 부킹 중
너트를 찾는 퀭한 눈동자로 스테이지를 도네요
one Night one Night,
뚜껑 열린 병맥주들이 테이블에 즐비하네요
짝을 찾는 눈들이 발갛게 달아올라요
한줌 허릴 돌리는 그녀의 실루엣을 재단하면
B컵, C컵이 병나발 불며 볼트를 담금질을 해요
제짝이 아닌 나사들이 기름을 칠 하네요 여전히 헐거운가 봐요 그 봐, 무대에 뚜껑이 닫히잖아! 너트들은 핸드백을 주섬주섬 챙기며 흩어진 몸을 매만져요 0시가 넘어가자 우르르 몰려오는 또 한 무리의 헐거운 나사들 자, 이제 뚜껑 열릴 시간이에요
자낙푸르*
레일 위에 펼쳐진 좌판 설익은 과일은 아낙네들의 수다로 익어가고 누군가는 선로에 오줌을 누고 있다 아직도 기차는 오지 않는다 해가 한 뼘 기울자 레일이 달아오르고 보따리 상인들은 주섬주섬 철로 밖으로 짐을 옮기고 역은 장터가 된다
하루 세 번, 하나뿐인 여덟 량의 기적소리에 놀란 노을이 붉은 가슴을 쓸어내릴 때 자전거가 추월하는 풍경을 매달고 기차는 천천히 국경을 넘어간다
달리던 시간도 걸음을 멈춘다 이곳에 오면 풍경도 쉬었다 가고 풀 뜯는 소들의 눈망울과 바람의 손금을 들여다본다 구름의 속도보다 앞서지 않는 사람들 관광객 카메라 셔터는 자낙푸르역을 끌어당긴다 길게 펼쳐진 한낮,
기차 지붕에 빼곡하게 걸터앉은 사람들 피난민처럼 매달려간다 덜컹거리는 지붕은 3등석 널빤지 창문에 자전거들이 거꾸로 매달리고 자전거보다 느긋한 속도가 레일 위에 미끄러진다
————
*네팔에서 인도까지 가는 네팔의 유일한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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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여원 / 서울 출생. 제3회 활천문학상 대상 수상.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우수상. 제29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시부문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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