配所輓妻喪(배소만처상: 유배지에서 처의 상을 당해 쓴 만사)
聊將月老訴冥府(료장월노소명부) 장차 월하노인을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서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나는 죽고 그대는 천리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有此心悲(사군지유차심비) 이 마음 이 슬픔 그대에게 알게 하리라.
※ 참고
1. 지은이는 조선 명필 추사 김정희(1786 - 1856)로
추사가 말년에 제주도에 유배 가서 지은 詩이다.
한민족 5000년 역사에서
신라 김생, 조선시대 안평대군,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4대 명필이라 하는데,
전문가들이 최고의 명필로 추사 김정희를 꼽고 있다.
7세 때 쓴 김정희의 글씨를 보고,
당시 재상인 체제공은 장차 명필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1816년 추사 나이 30세 때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학에 입각하여 이 비(그때 까지는 무학 대사가 세운 걸로 인식됨)가
조선 초에 세워진 무학대사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순수비임을 증명하고 해독해 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 누구도 추사의 고증학문 경지에 까지
올라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한도를 비롯한 동양화도 가히 신의 경지에 있었다.
유학에 있어선 당시 청나라 최고의 지성 완원은
추사에게 완당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사제관계를 맺었고,
옹방강은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는 휘호를 내리고 추사를 극찬하였다.
실학자 박제가의 제자인 추사는 학문과 실생활 모두에서
실사구시의 정신 기조로 초지일관 하였다.
1인 5역으로 모든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추사는
겸손했으나 프라이드는 대단하여 이로 인해 당쟁에 휘말리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죄인으로 살아갔다.
2. 시의 제목에 있는 配所(배소)는 죄인이 유배된 곳이고,
輓(만)은 輓詞(만사)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이다.
妻喪(처상)은 아내의 상을 당하다.
3. 인터넷에는 심지어 한시서적에 까지
첫 번째 행의 聊將(료장)을 那將(나장)으로 표시한 것이 눈에 제법 띤다.
聊(료)자는 애오라지 료, 편안할 료, 어조사 료 이고,
那(나)자는 어찌 나, 어조사 내 이다.
어조사는 한문에서 토가 되는 於(어), 矣(의), 焉(언), 也(야)
등등의 글자로 문장에서 실질적인 뜻은 없고,
그저 돕기만 하는 助語(조어)를 말한다.
김정희의 원작에서는 어조사 聊(료)를 썼다.
4. 月老(월로)는 月下老人으로 달 아래 늙은 노인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는 중매인을 일컫는 말로,
중국의 옛 문서인 「진서」와 「속유괴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때
위고 라는 청년이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허난 성에 이르러,
허름한 여관에 묵었다.
바로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한 노인(월하노인)이
긴 자루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위고가 무슨 책을 보느냐고 물으니까
노인 왈
“이것은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여를 여기 자루 안에 있는 빨간 끈으로 묶어 놓으면,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부부로 맺어 진다.“ 고 말하였다.
이에 위고가
“그럼 제 배필은 어디 있습니까?” 하니
노인 왈
“허난 성에 있다.
저 북쪽에 채소를 파는 노파가 안고 있는 아이가 바로 자네 짝이다.“ 하였다.
하여 위고가 참 이상한 노인네다.
하면서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무시하였다.
그로부터 14년 후
위고는 상주 지방의 관리가 되어,
그 고장의 태수 딸과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17세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위고가 어느 날 문득 오래 전 월하노인의 말이 생각나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여자가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저는 원래 태수의 친딸이 아니고,
친 아버지는 허난 성에서 벼슬하다 돌아가시고,
유모가 채소장사를 하면서 길러 주어 현재 태수의 양녀가 되었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 후부터 월하노인은 중매쟁이로 통했다.
5. 冥府(명부)는 염라대왕이 거주하는 저세상.
6. 千里(천리)는 김정희의 고향 예산과 유배지 제주도와의 거리가 천리.
7. 유배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던 추사에게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는 그 먼데까지 김치를 담가 보내곤 했다.
이런 아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사망 후 한 달이 지나 제주에서 접하고,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었던 지아비로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1842년 겨울, 추사 나이 56세 때 이 작품을 지었다.
학문, 벼슬, 시, 서예, 그림 등에 두루두루 경지에 올라선,
선비 추사의 한시이기에 선비사회에서도 애틋한 부부애로 낭송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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