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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현실 인식과 시정신의 균형 / 강인한

by 솔 체 2014. 10. 5.

현실 인식과 시정신의 균형

강인한



음악이나 미술은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문학은 삶에 뿌리를 내리고 언어로 꽃을 피우는 예술이다. 더욱이 시는 삶의 현실을 표현하되 그것이 겉으로 추하게 드러나서는 안 되며, 언어적 측면의 시정신 또는 예술성을 드러내되 한갓 공허한 말장난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짧은 시론이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시 일반에 대한 이론을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은 도리어 실제로 시를 창작하는 데에는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1965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겨울은 점령군처럼 급히 왔다.


부러울 게 없어야 할 시절에
교정에서,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서 모표를 반짝이며
애당초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몰래몰래 막걸리를 마시더니
무섭게 자라버린 그친구가
애당초 글러먹은 나라의 특등사수가 되어
터지는 포화 속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친구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를 떠난다 해도
하나 안 기쁘고 하나 안 슬픈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하나도 하나도 안 기쁜 환송을 받으며
친구는 웃었다.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똥에 짓눌렸던 게지
짓눌려 터지는 소리가 우리들의 방
문풍지를 울렸던 게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사랑하는 친구가 젊디젊은 나이를 총구에 달고
가버렸을 때,
겨울은 무심히
우리들의 텅텅 빈 가슴에 무심히
겨울은 닻을 내렸다.


칫솔에 묻어난 피를 닦는 일상의 어느 아침
문득 받아든 에어 메일,
친구의 얼굴이 두 손바닥으로 감쌀 수 있는
그래서 안녕이 더 그리운 수만리 밖의 체온
체온을 만질 수 있는 문명을
감사해야 할까,
날아온 친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는, 하늘이 뜻한다면
고향 집 마당도 쓸고
보리밥 된장찌개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낯선 바람에 깎여 코가 커지고 눈알이 파래진다고
사랑하는 친구는 웃고 있지만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겨울이
우리들의 내장 속에서 정박을 하고
우리들은 지금, 글러먹은 땅에서 어차피 굴러먹는다.
창자 속에 얼어붙은 겨울을 꺼내어
개선장군처럼 웃는다.
산다는 것이 즐거워서 웃는다.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우리가 떠나온 그 교정의, 그 미루나무 아래에선
우리들의 동생이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마시며
아, 무섭게 자란다.
미루나무는 이파리도 없이 무섭게 자란다.

나는 전주고등학교 시절에 문예반인 '맥랑시대' 동인이었다. 신석정 선생님이 지도교사였고, 당시 학생 잡지 '학원'이 고교생들의 산문 이삼십매짜리를 게재할 때 우리는 곧잘 원고지 일백매가 넘는 단편소설도 끄적이면서 도무지 무서울 게 없었다. 동인 중 몇은 흑석골이라는 골짜기에 찾아가 객기를 부리며 막걸리를 마셔대기도 하였었다. 우리는 형제 이상으로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자 다들 제각기 흩어져 갔다. 나도 대학에 진학했지만 허무하기만 하고 왠지 정붙일 곳이 없었다. 이 무렵 1965년은 대학 4학년 시절이다. 몇 달을 두고 전국의 대학생들과 국민들의 들끓는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급기야 박정희 군사정권은 굴욕적인 한·일 협상을 타결시키고야 말았다.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베트남 전선에 비둘기 부대, 맹호 부대가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파병되었다. 월남전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우리 나라에 용병을 요청하였고, 박 정권은 개발 독재에 필요한 자금의 마련을 위해 젊은이들의 목숨을 주저없이 빌려준 것이었다. '맥랑시대' 친구들 가운데서 1년 선배인 오홍근 형이 맹호 부대로 가게 되었다.
몇 친구가 모여 흑석골로 갔다. 형제 같은 친구를 전쟁터로 보내는 자리였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지만 조금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부산항의 부두는 가을이래도 바닷바람이 세었을 것이다. 그 뒤 다낭에서, 퀴논에서 위통을 벗어제낀 채 웃고 있는 사진과 함께 홍근 형의 편지가 왔다. "하늘이 뜻한다면, 고향에 돌아가서 된장찌개에 보리밥을 실컷 먹고 마당을 쓸어 보고 싶다."고도 했고, "미군 레이션 깡통을 까먹다 보니까 나도 코가 커지고 눈알이 파래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익살을 부린 편지도 있었다.
나는 「1965」라는 이 시에 도대체 글러먹은 한·일 회담과 월남 파병을 담고 싶었다.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시 정치 상황에 비추어 만용에 가까웠으므로 나는 시의 행간에 그것을 감춰 넣었다. '일천구백육십오년'이라는 거듭된 반복이 무엇인가 더 말할 듯 말할 듯하면서 말을 삼켜버린 느낌을 받도록 하였다. 친구가 전쟁터로 떠남과 동시에 이 나라엔 겨울이 닥쳐오고, 그 겨울이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상황인데 우리들 다음 세대 역시 똑같은 겨울을 무섭게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극의 계승을 나는 쓰고자 하였다. 후렴구 같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에 물론 시의 음악적인 효과를 어느 정도 고려한 면도 있었다. 비교적 차분한 심정으로 「1965」는 쉽게 쓰여진 셈이었다. 이 시는 서너 차례의 옮겨 쓰기 과정밖에 거치지 않고 완성되었다. 부산항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전송하던 수많은 손과 손, 풍선을 하늘 높이 띄우고 비둘기 떼를 한꺼번에 날려 보내던 그 뉴스 영상이 지금도 흑백 필름으로 내 기억의 한편에는 남아 있다.

오늘의 시가 상업예술이 아니고 비상업적인 예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모든 상업주의를 거부한다. 지나친 테크닉 위주의 장인적인 상업성과 지나친 독선의 정치적인 또다른 상업성도 우리는 거부한다. 시인은 가수도, 정치가도 아니다. 시인은 다만 운율 있는 언어로 자기의 성을 구축하는 언어의 주인일 뿐이다. 주제가 없이 도도히 범람하는 현란한 의상과 공허한 핏대를 똑같이 우리는 배격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성실한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주제와 올바른 아름다움이 있는 참다운 시를 지향하며 우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1979년 '목요시' 동인지 첫 호에 내가 쓴 동인의 선언이다. 70년대까지도 순수시와 참여시(80년대의 민중시)의 대립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 둘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다. 시가 주제 전달에만 집착하면 정치적 구호가 될 것이며, 시가 또 삶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은 아름다운 의상에만 집착하면 공소한 지푸라기로 전락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실 80년대의 상황이 나에게 그러한 균형 감각의 유지를 어지간히 괴롭힌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필경 시인은 자기 언어의 주인에 다름아닐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 밖에 나가 쪼그려 앉는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 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편리한 우리들의 귀.

노트를 보니 1984년 6월 16일이라는 날짜가 시의 끝에 적혀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라는 첫 구절을 쓰고 거의 한 달 동안 시상을 진전시키지 못했다. 그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한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기가 끝나면 또 다른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는 잠언적인 서두에서 한참을 못 벗어나다가 '바람'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말문이 트였던 생각이 난다. 80년 5월을 광주에 살면서 생체험으로 항쟁의 시기를 겪었던 나는 ― 광주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억울하고 답답하였다. 이렇게 또다시 억압의 시대가 이어지는가 싶어서였다. 그 무렵 우리의 언론들은 유추적 현실로서 필리핀의 민주화를 통제 속에 1단 기사로 싣고 있을 때였는데, 마르코스의 독재에 맞서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야당 지도자 아키노가 귀국하다가 총격으로 피살되고 말았었다. 내게는 그 사건이 우리 민족에게 던져진 하나의 무서운 상징인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우리 국민들은 진실에 어두운 것일까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진실에 어두운 사람들을 '귀'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터무니없는 헛소문에 쉽게 내둘리고,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귀, 수도 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나 듣고 아예 큰 소리(진실)를 굳이 외면하는 귀. 작고 무의미한 일에는 쉽게 흥분하고, 크고 의미 있는 사건에는 정작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 국민성이 언제부터 비롯된 것일까. 생각해 보면 경제 개발의 미명 아래 보다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짓밟은 오랜 군사 독재의 필연적인 산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시 속에서 나는 진실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우리들의 습성을 짚어 보고 싶었다. 밤에도 '문 밖에 나가 쪼그려 앉는...... 귀'에서는 궁상맞은 몰골에 대한 냉소를, 수도 꼭지와 동그란 소문의 은유적 일치를 거쳐 '편리한 우리들의 귀'에선 소시민적 자기 기만에 대한 야유를 넌지시 담아 본 것이다. 또한 3연의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에서는 화자의 진정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서 '사람이'를 반복하여 의미와 운율을 동시에 살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을지라도 한 편의 희화적 풍경으로 이 시를 읽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 시를 썼는데, 충분히 형상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랏빛 남쪽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싱싱한 초록이다.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 잎에 앉은
청개구리

한 소쿠리 감자를 쪄 내온
아내 곁에
졸음이 나비처럼 곱다.

비교적 최근인 1993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짧은 시이건만 무던히 긴 숙성 기간을 거쳤다. 혹독한 가뭄으로 시달리다가 문득 단비가 내릴 때의 기쁨과 작은 평화를 스케치한 시인데, 처음엔 백지에 두어 줄밖에 못 썼다. 아무래도 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노트 갈피에 끼워 둔 채 가끔씩 꺼내보았지만 이미지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5년만에 문득 '토란 잎에 앉은 청개구리'의 영상이 떠올랐고, 다시 '보랏빛 남쪽 하늘'이 뒤를 이었다. 비를 머금은 서늘한 구름을 배경으로 하고 결국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 잎에 앉은 청개구리'라는 가운데 연이 이루어졌다. 감자를 쪄서 가져오는 아내와 달콤한 빗소리 속의 졸음, 마지막 연의 이미지가 쉽게 풀려 나왔다. 그러면서도 이 구도 속에 '아내'를 배치할까 말까 오래 망설였다. 두보의 율시 「강촌」에 나오는 아내의 이미지와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졸음을 꽃처럼 곱다고 하지 않고 나비처럼 곱다고 한 것은 '나비잠(갓난아기가 두 팔을 머리 위에 벌리고 자는 잠)'을 연상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감자를 먹고 초록의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도 나비잠을 자고 싶은 심경을 쓴 것이다. 물론 '나비'와 '나비잠' 사이에는 의미의 편차가 심한데도 "꽃처럼 곱다."보다 "나비처럼 곱다."는 쪽을 나는 택했다. '나비'에서 졸음의 가벼움과 나긋나긋함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둘째 연을 돌아보면,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 잎에 앉은
청개구리

이것이 초고의 둘째 연이었다. 그러나 시란 단순히 산문을 몇 도막 줄가르기 한다 해서 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밋밋한 호흡을 다시 추스려 보기로 하였다.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 잎에 앉은
청개구리

'남쪽 하늘'을 행을 갈라 달리함으로써 이미지의 단절과 한 호흡 뒤의 연속에서 빚어지는 시적 긴장을 취하자는 의도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초록, 보랏빛, 토란 잎, 청개구리의 시어들이다. 시의 전체적인 색조를 푸른빛으로 처리하여 담수채화의 맛을 내고 싶었다.
고백하건대, 이 시는 내가 '쓴' 시라기보다 '쓰여진' 시에 가깝다. 한 편의 시라는 마알간 이슬이 붓 끝에 맺히기까지 때로는 5년쯤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 것을 나는 「보랏빛 남쪽」을 쓰면서 깨달았다.

습작 시절 나는 초고를 완성한 뒤에는 그것을 꼭 새 종이에 옮겨 쓰면서 퇴고를 했다. 최소한 다섯 번 이상, 심한 경우엔 열다섯 번이나 옮겨 쓰기를 한 시도 있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언제나 소리내어 읽어 보았는데 시의 전체적인 틀을 바로잡고 운율을 살려내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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