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주제와 올바른 아름다움
강인한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80년대가 조용히 저물어 간다. 80년대는, 그렇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연대로 기록되어 마땅하리라. 지난 70년대가 군사 독재로 일관된 암울한 시기였다면, 80년대는 이른바 민중 자각의 연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민주화의 실체를 국민 모두가 몸으로, 생체험으로 겪은 한 연대가 아닐 수 없다.
80년대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불행한 광주의 비극으로부터 출발되었으며, 학살되고 암장된 이들의 피의 흔적을 확인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것이다. 문학이 인생을 표현하는 예술일진대, 시 또한 인생의 문제, 현실의 문제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으리라 본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의 많은 시들이 80년대에 들어서 목소리를 높여 현실의 삶을 말하고 현실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가 문학에 포괄되며 문학이 결국 예술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시 또한 예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면 그 존재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시로 쓰면서 내가 항상 고심해야 했던 건 바로 이 문제였다. 한 편의 시 속에 현실을 담아 <기록>하는 이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식이 항상 나를 물고 늘어졌다. 어찌 생각하면 피투성이 아우성의 현실과 상당한 거리를 두어야만 표현은 가능했으며, 그것은 단순한 기록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일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광주의 5월이 그러했다.
1980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광주는 시외전화가 차단되고, 교통도 완전히 두절되어 버렸다. 완벽한 어둠, 절망밖에 만져지지 않는 섬. 그건 피카소의 「게르니카」였고, 광주에서 숨쉬는 우리 모두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는 있으되, 외부로 사실을 말할 수는없었다(광주에서 그때를 살지 않고 광주를 입에 올리는 시인들을 나는 감히 경멸한다). 그 열흘 동안의 기억은 내가 소년 시절에 겪었던 6·25를 능가하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릴케의 말처럼, 나는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때 내가 살아서 끄적거리는 일기나 시가 전혀 타의에 의해 없어져 버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으나, 나는 그 때 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중의 하나가 졸시 「광주, 1980년 5월의 꽃」이었다.
허공에 높이 떠 있습니다
내려갈 길도, 빠져나갈 길도
흔적 없이 사라진 뒤
소문에 갇힌 섬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한 주일만에 나선 오후의 외출에서
꽃상자 속에 담긴 꽃들을 만났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키 작은 꽃들
가혹한 슬픔을 향하여
벌거벗은 울음빛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 시늉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그 해 6월로 기억된다. 때마침 『현대시학』의 전봉건 선생님으로부터 시 청탁을 받은 터라, 나는 곧바로 이 시를 보내 드렸다. 계엄 당국의 검열을 잠시 생각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한 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전봉건 선생님 특유의 꿈틀거리는 글씨의 사연과 함께 그 시가 반송되어 돌아왔다. 시기가 좋지 않으니 이 시는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 좋으리라는 사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문협의 기관지인 『월간문학』에 제목만 「팬지꽃」으로 고쳐서 슬쩍 보내 보았다. 다행히 10월호에 「팬지꽃」은 탈없이 발표되었다. 광주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그나마 다행스러웠고 한편으론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그 5월의 광주는 내 인생에 있어서 닻을 내려야 할 바다가 어딘가를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들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변죽만 울리기도 하다가 급기야 소리 높여 고함치게 되고, 이른바 민중시가 나타난 건 80년대 후반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요즘의 민중시들이 풍기는 운동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 동인(목요시) 활동을 하는 김준태 시인도 <문학은 선전이며 힘이다>는 민중문학의 슬로건에 긍정적인 듯하지만, 나는 좀 생각을 달리한다. <문학은 예술이며 감동이다>라고.
『목요시』동인지를 내면서 책머리의 선언에서 나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시는 시인의 성실한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주제와 올바른 아름다움이 있는 시를 지향하며 우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 우리는 비록 역사 속을 살고 있지만, 많은 역사적 사실의 충격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쓰고자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우리들 삶의 진실을 쓸 따름이다.
시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 하는 것은 80년 이후의 내 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것을 나는 <역사적 언어와 예술적 언어의 융합>이 되어야 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역사적 진실과 언어 예술. 역사적 진실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게 되면 민중시들이 지니는 결함인 공소한 선전으로 떨어지기 쉬웠다. 또 한편으로 언어 예술 쪽에 무게를 주게 되면 삶의 진실성이 결여되는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었다. 평형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이 물론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들어서 일부 젊은 시인들의, 상당히 전위적인 시를 나는 재미있게 읽는 편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것과 시의 감동과는 전혀 별개의 관계라고 본다. 달리 말하면 단순한 재미는 단순한 일회성을 의미한다. 감동의 경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재기 발랄한 요설과 패기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오랜 여운의 감칠맛을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방법론에 있어서 나는 고집스런 보수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어 이제 지천명의 나이로 슬슬 나아가는 이즈음, 내 시는 자꾸만 서정의 윤기가 덜해지고 목소리가 탁해지는 듯해서 겁이 난다.
체질적으로 나 자신이 약골이라서인지 나는 폭력이 싫다. 폭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또 다른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의 폭력에 맞서 간디가 저항한 무기는 결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사회에 횡행하는 물리적인 폭력도 싫고, 시에 있어서 언어의 폭력도 싫다는 게 내 숨김없는 고백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영원한 평화주의자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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