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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 문 학 상

2007년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 이애경

by 솔 체 2014. 10. 20.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 이애경

수혈



붉은 햇빛이 피는 봄날, 가시밭길에 쓰러져있는 엄말 끌어당겨요 축 늘어져 딸려오는 엄마, 꽃 지듯 몸이 지고 있어요 몸 군데군데 코가 빠지고 실밥이 너덜거려요 작은 바람에도 팔랑, 뒤집히는 엄마를 고르게 펴요 뜨개질도 재봉질도 할 줄 모르는 나는

하는 수 없어요 늘 하던 대로 수선 집에 맡겨야죠 어떡하나요, 구멍 난 몸에 덧댈 조각이 없어요 내가 가진 건 성긴 슬픔이거나 젖은 마음 뿐,

하는 수 없어요 젖은 마음이나마 오려 구멍 난 엄말 메워야겠어요 물빛 엄마를 물들여야 겠어요.

어떠세요 엄마, 제 마음 잘 스며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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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환한 알몸,
양파에게도 부끄럼이 있다는 것 나 껍질을 벗기다 알았네
한겹 옷을 벗기자 놀란 양파 살갗을 움츠리네
저 자연스런 본능은 가장 깊은 곳에 여성의 생식기를 숨겨둔 때문이라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맥박소리
쿵쿵 심장 뛰는, 씨눈이 길 여는 소리
환청, 그래 환청이라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잘라버린 뿌리 설마 그것이 파란 씨눈의 젖줄이었을 줄 나 까맣게 몰랐네

알몸 드러난 순간
맵게 노려보는 눈빛, 독기를 품었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하다 다독이는데
아 글쎄,
꽃처럼 활짝 제 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저를, 중심을 다 내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만 아찔, 두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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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재봉틀



두두두, 밤늦도록 말을 타고 달려요 안장 위의 그녀, 휘날리는 말갈기를 보드랍게 쓰다듬죠 네 평짜리 마구간엔 모래 같은 보푸라기 날리구요 붉디붉은 그녀의 눈 말발굽소릴 따라다녀요 얼마나 달렸을까요 잠시 고삐를 늦추어요 지친 말이 털썩, 모래바람 위로 주저앉아요 가쁜 숨 내려놓고 괜찮다, 괜찮다고 서로를 위로해요 숨을 고른 말이 먼저 히힝, 무릎 일으켜요 달리는 말발굽 아래 꽃송이 피어나고 초록 이파리를 심는 그녀, 부지런히 고삐를 당겨요 힘껏 페달을 밟아요 하나의 꽃밭이 완성될 때마다 어둠이 부풀고 허기가 부풀어요 꽃을 피우는 푹신한 이불 한 채, 이쯤에서 잠시 꿈길을 걸었나? 고삐 놓친 손끝에서 꽃비린내 번지고 말 한 마리 쏜살같이 달아나요 헛디딘 말발굽 아래 피다 만 꽃 한 송이 누워있어요 충혈 된 전등, 졸음 가득 된 눈이 뚝뚝, 빛을 흘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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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웃음이 붉다




봄 닿는 곳마다 웃음이 핀다

한 홉 웃음에 뒤란 산수유꽃 피우고 한 됫박 웃음에 거리의 벚꽃 피우고 한 말의 웃음에 온 산 진달래꽃 피우고, 피우고

겨우내 마른 몸에
물이 돈다

긁적긁적, 내 몸이 가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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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새끼들 옆구리에 달고
一家를 이룬 선인장
얼마 전
탯줄 자르듯 몸에서
새끼들 떼어냈다

자 이제부터는 목마름도
스스로 견딜 줄 알아야 한단다
작은 화분으로 옮기는
순간,
솜털 같은 가시를 세워
몸 밖을 바짝 경계한다

나를 내보냈던 문
잡고 있는 손을 그만 놓으란다
다섯이나 매달려 뼈마디마저 헐렁해진
몸, 이제 닫을 시간이라고
노쇠한 그림자
열렸다,
닫혔다,
숨이 가쁘다

떼어낸 새끼들 내려다보는 어미 선인장
핑, 젖이 돈다
젖몸살을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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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경 전남 영암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6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
2007년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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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남성적인 힘'과 '서정성'

김종해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예비시인은 모두 열 사람이었다. 이분들은 '시인'의 이름을 얻기 위해 모두 열 편이 넘는 힘들인 옹모작을 각기 투고했다. 나름대로 평이함을 뛰어넘는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작품 한 편 한 편의 미세한 언어 쓰임새와, 감성과 함량의 눈금을 꼼꼼히 따지는 선자의 눈에는 작은 허점마저도 간과될 수 없었다.
최종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선자의 주목을 받은 사람은 최란주의 땡볕법정 외 9편, 박승류의 햇살검객 외 9편, 이건의 씨앗론 외 11편,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외 11편,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 외 9편이었다.
햇살검객은 표현은 예리하나 생활 속에서 상처받을 수 있는 화자의 여러 검법 나열이 조어造語에 가까웠고, 씨앗론은 꽃사과에 대한 사색적 탐색은 신선하나 산문적인 어투가 응축력을 잃고 있어 탈락했다.
최란주의 카페 라캄파넬라의 뇌쇄적인 와인잔의 표현, 땡볕법정의 '사랑'에 대한 시로서의 법률적 판례, 네모난 거울의 고소인과 피고인의 양면을 보는 화자의 시각은 독특했다. 그러나 함께 투고한 10편 모두 이 같은 시적인 응축과 긴장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경합한 작품은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외 11편과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 외 9편이었다. 두 사람이 내보인 시풍詩風은 판이했다. 이애경의 시풍은 따뜻하고 섬세한 서정시의 아름다움이 각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행간마다 감성이 살아 있고, 삶과 존재에서 배어나는 따뜻한 피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수혈과 같은 작품은 생명의 절실성과 내통하는 '마음속의 수혈'을 볼 수 있다.
김산의 시풍은 활달한 남성적인 힘과 우주적인 상상력을 깨닫게 한다. 가공의 시의 공간을 화자의 현실로 연결시켜 가는 능력도 만만치 않다. 광릉, 우드스탁 같은 시는, 축제의 가상공간 속에 실제로 초대받은 젊은이처럼 열광하는 울림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시를 놓고 선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며 숙고했다. 그런 연후 이애경, 김산 두 사람의 당선을 결정했다. 두 사람 모두 좋은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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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시세계의 균형과 조화

신달자


예년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심사는 늦어지고 있었다. 심사 마무리에 가서 본심에 든 원고 모두를 다시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심사는 난항에 들고 있었다. 당선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도 감돌았다.
우선 다섯 편의 작품을 거론하기로 했다. 이건의 씨앗론, 최란주의 카페 라캄파넬라, 박승류의 햇살검객,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이었다. 다시 혼돈에 들었다. 이건과 최란주의 작품도 시적 자질이 눈길을 끌었지만 오랜 설왕설래 끝에 박승류, 김산, 이애경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세 작품은 다시 심사위원들의 공론에서 갈등의 파도를 탔다. 박승류는 구두, 햇살검객 같은 작품으로 나이만한 삶의 경험을 통해 잘 가라앉은 사유를 독특한 터치로 생동감있게 그려놓았으나 왠지 공허하고 잡히는 것이 없다는 평이었다.
김산은 모든 작품이 펄펄 나는 듯한 상상력 솟구치는 젊은 근육질의 언어들이 알싸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는 해도 왠지 이거다 싶은 뭉쳐진 사유의 전달의지가 허약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애경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의 재봉틀, 수혈, 양파 정도의 작품은 냉철하면서 진지하고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시작의 묘미와 섬세한 서정의 절박성이 보였지만 다른 작품들이 가벼운 소품이었으며 신인으로서 우려되는 저장된 사유자산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심사는 김산, 이애경 두 사람을 뽑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시인세계>의 상금문제를 극복하면서까지 두 사람을 주기로 결심한 것은 두 사람의 시세계가 사뭇 다르면서 두 사람의 시가 보완상응하는 균형을 갖는 것으로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어보자는 합의 때문이다. 그 균형은 이 시대의 시단에 지극히 필요한 양극의 조화라는 중요한 영양제를 각기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음을 알린다.
어렵게 등단한 두 신인의 시가 기대를 넘어서서 문명의 횡포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의지가 되는 시의 깃발 역할을 성실히 해 주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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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적이고 젊은, 시적 가능성

정효구 (평론가)


오늘날, 우리 시단의 양적 팽창이 질적 수준의 비약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크다. 너무 많은 것은 전혀 없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다多' 가 '강强'은 아니다. 다변이 달변일 수도 없으며, 달변이 가슴을 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진화를 믿고 싶은 마음은 신인의 등장을 기다릴 때마다 설렌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10명의 응모작은 높은 기대 탓인지 그렇게 흡족하지만은 않았다. 시란 곰삭은 '진언眞言' 이어야 한다는 자각, 언어는 침묵에 가까울수록 힘이 있다는 인식, 유사한 상상력과 이미지는 타인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등이 더욱 깊숙이 응모자들에게 각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 있었다. 극기와 자기다움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더 오랫동안 생각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산, 이애경, 박승류의 시는 관심을 끌며 몇 차례 논의를 계속하게 하였다. 김산의 시가 보여주는 거침없는 활달함과 왕성한 생명력, 이애경의 시가 간직하고 있는 섬세한 서정적 관찰력과 화법의 독특함, 박승류의 시가 지니고 있는 고단한 생체험과 그것의 애틋한 승화과정이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김산의 시는 좀더 강력하게 수렴하는 응집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 이애경의 시는 시창작의 수원水源이 보다 충일해야 하겠다는 마음, 박승류의 시는 그 전개과정이 좀 더 유연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전해지는 강한 시적 가능성은 그들 가운데 한두 사람을 당선자로 선정하자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하였다. 세 사람을 놓고 고민하다가 시 속의 도전적이고 젊은 기운이 보다 호소력 있게 전달되는 두 사람, 김산과 이애경을 최종적인 당선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번에 아쉽게 제외된 박승류의 시는 물론, 경쾌한 언어구사력을 지닌 최란주의 시, 주변을 보듬어 안는 성실성이 뛰어난 이건의 시도 앞날을 기대할 만하다. 당선자 두 사람은 물론 이들 모두가 정진하여 '참시인'의 길을 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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