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시
침몰하는 저녁
이혜미
내가 밑줄 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어느새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오는구나 그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너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이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꼭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 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 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 디디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들이 집요하게도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 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 들어와 붉게 흐르고 나 역시도 이름 버린 것들의 누이가 되고 말 것 같은데
나에게 진한 붉음으로 표식을 남긴 저물녘을 건너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 세계는 자꾸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려 하고 잘려진 나의 탯줄에 다시 뿌리가 내리면, 너는 저물며 빛을 키우고 빛이 저물며 어둠을 잉태하고 어둠이 다시 너를 산란한다. 그 속에서 나도 세상과 함께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던 것인데, 처음으로 돌아가려던 것인데, 내 속의 실뿌리들이 흔들리며 누이야 누이야, 내가 버리고 온 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거라. 물관으로 흐르는 맑은 피는 양수가 되고… 체관으로 흐르는 진득한 피가 세계에 지천으로 꽃을 피워내는데… 아아 네가 오더구나,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 네가 오더구나
이혜미 1987년 경기도 안양 출생. 건국대 국문과 1년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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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1920년대 이상화 시인의 운율 느껴져`
핵과(核果)가 여무는 기다림의 가을 초입에 신인을 찾는 마음은 추억과 즐거움을 준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에서 한 편의 시를 선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준을 세우고 심사하였다. 주류 현상에 몸 섞어 흘러가는 시가 아닌, 자기 주술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름이 아닌 심저(心底)에서 직접 시의 무늬를 건져 올리는 시인이기를 바란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강미라('국수나무가 열리는 계절' 등) 이산('글자를 씻다' 등) 김혜정('나무의 애인' 등) 백상웅('코끼리 무덤' 등) 씨의 작품들은 자기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부분 부분 형상의 방심이 드러나고 상이 지나치게 뚜렷하여 이미지가 손상되는 범상성과 작품 수준의 격차가 눈에 띄었다.
아침 저쪽의 어두운 저녁을 유려한 시행으로 끌고 간 자정(自淨)의 리듬을 높이 사서 이혜미씨의 '침몰하는 저녁'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새로운 역할의 시는 근대성에 가까이 있는 것에만 있지 않고 먼 곳이나 소외된 것들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외가 있다. 당선작은 분주하고 잡다하지 않은 순진한 사색으로 '너'와 '나'를 동일성 속에서 비춰보는 작품이다.
1920년대 이상화 시인의 호흡과 운율을 턱 빌려온 듯한 시법이 오히려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밑줄 친 황혼 사이로 오는' 너를 맞이하는 '나'는 성(性)의 비밀과 출생을 바다의 침몰 위에 올려놓고 밑줄을 친다. 타인의 품에 안겨 있는 자아의 영아를 대상화하여 초경혈 같은 떨림의 언어로 그려냈다.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온다'는 미적 환시(幻視)가 그것이다. 또 우리 시에서 사라진 '누이'가 새롭게 호명된 점도 심미적 충동을 새롭게 한 특이성이다. 여성 화자가 부르는 누이가 낯설지만 그들의 사랑이 어둠 속 바다로 사라졌다가 재생되는 사실에 화자는 눈뜨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오염시킨 자궁을 복원하려는, 우리를 향한 시의 반성적 저항이다.
리듬을 놓지 않고 저 너머의 핏놀빛 아침을 보게 한 것 자체가 경이이다.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너'는 여성이며, 타자들은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를 부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사라졌지만 기억 속에 있는 우리 시의 한 언어이자 핵과 같은 운명이다. 10대 후반의 시인으로서 두려워하지 말고 깊은 곳으로 몸을 낮춰 영혼을 깎는 시를 쓰기 바란다.
◆ 심사위원 = 김명인. 고형렬 (대표집필 고형렬)
◆ 예심위원 = 나희덕. 홍용희.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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