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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 문 학 상

제9회 〈시인세계〉신인상 / 김 산

by 솔 체 2014. 10. 21.

제9회 〈시인세계〉신인상 / 김 산

날아라 손오공


별이 내게로 왔다 이 별에 내리기 전 나는 잠시 여자의 몸 속에서 살았다 이제 나보다 큰 별이 나를 잉태하고 있었으므로, 쿤* 별을 여의주로 물고,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거리가 팔만대장경이다 나는 팔만 사천 자를 날아서 왔다

비와 바람과 구름에 새겨진 한 자 한 자는 내 주름살로 그대로 판각되었다 나는 천공을 어지럽히던 모든 활자들을 주름감옥에 가두었다 비로소, 나를 옥죄던 번뇌와 근심들은 잠잠해질 것이므로, 이제 목판처럼 나는 단단해질 것이다

이 별의 사람들은 부적을 든 삼장법사처럼 순하고 깊은 눈으로 나를 본다 어느 날, 아이들이 노인들을 낳고 또 다른 낯선 별과 조우했을 때 아이들은 내가 만든 감옥의 열쇠를 하나씩 열어 볼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진지하게 내가 왔던 별을 생각하리라

고로, 황포한 나의 활자들이 수천의 분신으로 날아오를 때 차마 일어서지 못한 내 육신을 생각한다 이 별이 내게 왔을 때, 내가 나를 가두었을 때, 그리하여, 내가 이 별을 괴로워하며 몸부림칠 때를 생각한다 가만히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 페이지씩 경전이 넘어간다 나는, 온몸이 주름인, 세로로 받아 쓰인, 미륵이다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몸으로 런던올림픽 육상 5개 부문에서 우승을 하여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 여성'이라 불린 육상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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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우드스탁



치키치키, 빗방울이 16비트 리듬으로
살아나는 광릉수목원에 가본 적 있나요
수십 만의 히피나무들이 부동자세로
입석 매진된 한밤의 우드스탁 말이예요
레게머리 촘촘한 수다쟁이 가문비나무와
짚내복을 사철 입고 사는 늙은 측백나무 사이
우르르쾅, 천둥 싸이키가 번쩍거리고
다국적 수목원 안에 쏟아지는 박수 소리
고막을 찢으며 축제는 시작되지요
굵어진 빗방울이 시름시름 앓고 있던
뽕나무 그루터기를 흠씬 두들기고 가는 밤
비자도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입국한
고무나무도 언제 새끼를 쳤는지 말랑말랑한
혀를 내밀고 빗방울을 받아먹고 있네요
때론 아무것도 흔들지 못한 빗방울들도 있어요
맨땅에 헤딩을 하고 어디에도 스미지 못하고
웅덩이에 모여 울고 있는 음악들을 나무들은
뿌리를 뻗어 싹싹 혀로 핥아주기도 해요
지상의 모든 음악들이 생생불식 꿈틀거리는
수십만의 히피나무들이 밤새 기립박수를 치는
광릉수목원 즐거운 우드스탁으로 놀러 오실래요
지난 가을부터 자작나무 가지 위에 걸터앉아
나, 당신만을 기다리는 올 나간 테디베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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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미용실



엘프족을 닮은 여자가 있다
이름 모를 행성과 충돌하고
흩어진 가계를 수습하기 위해
가위 하나만 달랑 손에 쥐고
지구별로 야반도주한 여자
건조한 내 머리에 물을 뿌리며
숙련된 손길로 싹둑싹둑
한 달간의 근심을 가지 치는 여자
웃자란 생각들을 좌우로 보며
마침맞게 중심을 잡아주는 여자
이따금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이
그믐처럼 그윽하게 입가에 스미는 여자
언젠가 여자는 나를 쓸어담고
그녀가 왔던 행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레이스가 달린 은하수 돗자리를 깔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불러모아
내가 지금 잠시 무릎에 손을 얹고
그녀의 손길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머언 작은 별 이야길 해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내 머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서 우주의 먼지들을
구석구석 헹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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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조리 쿡쿡 특강 1
―계란말이




사각 프라이팬 속에 식용유를 에두른다
팁 하나. 낙타, 고래, 거미 기름은
21세기 요리법이므로 주의를 요함
프라이팬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주어를 감싸고 있는 목적어와 서술어를
예각의 단단한 귀퉁이에 대고 맞부딪친다
덩어리진 관념을 적확한 그릇에 넣고
잘게 쪼개고 부수어 하나가 되게 한다
가끔, 두 개의 심볼이 퐁당 빠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부글부글 날것들이 거품을 물때까지
액자 식으로 끼워놓고 충분히 휘핑할 것
팁 둘. 한 스푼 소의 모유를 넣어주는 것도 무방함
포유류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은 조류들에겐
적당한 낯설음도 신선한 충격이니까
이제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언어들로
지글지글 프라이팬 위에서 묘사를 해보자
문득,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대
청량리産 김의 모포 한 장 따뜻하게 입혀주고 싶겠지만
아서라! 결국 이빨 새에 끼면 뱉어버릴 그대
주제가 찢어지지 않게 손목에 힘을 빼고
언어를 뒹굴리는 것이 최대 관건이다
숙련이 되면 스냅을 이용해 부하된 언어들을
공중부양 시킬 수도 있지만 너무 멀리 던져
돌아오지 못한 날개들도 있음을 명심할 것
넓은 사기그릇에 갈무리된 계란말이를 담고서
자, 시식! 삐약삐약 언어의 뼈가
잘근잘근 씹힐 것이다 오도독, 오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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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득 氏의 양복점 이름은, 럭키



일천구백오십팔 년 럭키양복점 김병득
아버지의 잿빛 양복 이름이다
오지랖 넓은 김병득 씨氏 덕에
김병득을 입고 등록금만 낸 대학을 자퇴하고
김병득을 입고 군산 색시집을 들락거리고
김병득과 함께 '선창' 불렀던 아버지
성性도 바뀌지 않는 병득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십 대를 안창 깊이 숨어 살며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십 년 연하의 대하리 촌년을 만날 때도
창경원까지 따라와 어깨에 힘을 실어준 김병득
김병득은 아버지 대신 주례사를 듣고
3등급 호텔 첫날밤까지 따라와 벽걸이 위에서
그 짓을 보며 킬킬, 거렸으리
그 덕에 내 형의 눈이 시침질처럼 찢어진 지도 모르는,
나와 내 누이의 출생을 김병득은 얼마나 궁금해했을까

환갑이 지난 아버지는 다려도 잘 펴지지 않는
김병득의 칼라를 세우고 보푸라기를 털어주곤 했다
문상 갈 때도 김병득은 희끗해진 아버지보다
앞장서서 덜덜덜 재봉 걸음을 걷곤 했다
겨울 언덕을 오르며 뇌졸로 쓰러진 아버지보다
먼저 쓰러진 것은 김병득이었다
아버지가 입었던 것이 김병득이 아니라
김병득이 항상 아버지를 보듬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나이 서른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다섯 식구를 다 키운,
김병득 氏의 양복점 이름은, 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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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산 1976년 충남 논산 출생. 2006년「웹진 문장」 연간 최우수 작품상. 2007년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시산맥, 시월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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