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시안 신인상 당선작 (<시안> 2006 가을)
러기드 파이터
송영미
누가 수건을 던져야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너덜너덜한 글러브 속 손가락은 부러지고
찢어진 가죽 사이 피가 스며 나와
끝이 보이지 않는 광막한 링 위에 서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해가 지는 걸 봤어
등뒤에서 슬그머니 떠올랐다 정수리쯤에서 급하게 지던 태양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두 발자국 뒤로 밀리는 건
이곳에 늘 높새바람이 흉흉하기 때문이지
비를 뿌리지 않는 메마른 바람
가슴팍을 떠밀며 보이지 않는 주먹 휘두를 때마다
울컥울컥 흰 수건 위로 토해지는 검은 담즙들
발목을 담그고 다만 서 있는 거야
먼데서 불어오는 바람 저 혼자 깊어지면
차가운 비를 몰아오기도 한다는 풍문에 기대어
* 러기드 파이터(rugged fighter) : 체력과 인내력이 강인한 권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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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
진창 깊숙이 몸뚱이가 빠진 지네 한 마리
대가리를 휘휘 내저으며 몸뚱이를 뒤틀 때마다
터진 창자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물
한 여자가 손가락을 덜덜 떨며 진창 위로 번지는 노란 피를 찍어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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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 무늬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진단서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맨 구름의 부족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메마른 와디*를 향해 침을 뱉고 신기루 속으로 떠났다 뱉어낼 침도 삼킬 침도 없는 지루한 환절기 목감기에 걸린 나는 오래된 가방 속 의료보험카드와 반쯤 남은 생수 병을 넣고 일요일에도 진료하는 도시 안쪽의 병원으로 간다 대기실 의자에 앉은 한 여자가 화상을 입은 발등에 하염없이 식염수를 붓고 있다 그 여자 발등에서 소리 없이 흐드러진 장미꽃 이파리 내 목안에 피어난 반점들 발갛게 부어오른 후두는 몇 도쯤의 화상을 입은 걸까 저절로 과묵해진 일상을 흥건한 소독 솜으로 적시면 공명되지 않은 소리들이 모래알 속으로 스며든다 잠 속에서도 목마름은 그치지 않아 내 안에 살던 낙타는 제 혹을 잘라먹고 쓰러져 일어설 줄 모르고 낙타의 뼛가루가 흩어지는 와디 속으로 불꽃이 인다 비는 몇 달째 도시 바깥쪽으로만 내린다
*와디(wadi) : 건조지역에서 볼 수 있는 물이 없는 강. 평소에 마른 골짜기이나 큰비가 내리면 홍수가 되어 물이 흐름. 고곡( 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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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미 1966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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