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신인 추천작품상 2007년 하반기 당선작
정지비행 (외 4편)
주 영 중
길은 이름이 필요해. 명상의 길이나 복숭아밭길 혹은 구산사거리나 구산역사거리 같은, 저 구름의 옷을 입고 걸어오는 저녁을 봐. 안개 낀 건물들 사이로 불빛이 길을 열어주고 있네.
저기 서현연립과 굿모닝마트 사이를 돌아오는, 여자의 가라앉은 심장에도 뿌연 저녁은 모여들지. 그리고 길들을 몸속에 말아 쥔 채 무심하게 돌아오는 사람들. 신경망처럼 얽힌 길 사이로 이리저리 가로질러 오는 것들의 이름은.
실내가 어두워지니 밖이 환해지네. 어두울 때까지 8층 높이로 떠 있는 심장, 돌 쌓인 북한산이 서서히 가라앉다 사라지고 점점이 좁혀오는 저녁. 벌새처럼 정지한 채 나는, 내 심장처럼 붉은 꽃들을 향해 무수한 날갯짓을 보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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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두 개의 첨탑 위에 두 개의 십자가가
완전한 대칭이다
나는 그것이 비 내린 밤의 거리와 새벽 거리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하마처럼 느린 하품 너머
두 개의 십자가가 유난히 빛나는 것은
병실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이며
정물처럼 서고 누운 두 사람 때문이다
다른 시간에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마치 계란을 위아래로 세우는 방법으로
침상에 누운 그를 바라본다
변검술사가 가면을 바꾸듯
그 변검의 사이에,
그의 얼굴이 잠시 흔들리고
창에 매달린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버렸다
불빛이 블라인드를 넘어
아름다운 칼처럼 방안을 가르는데
그의 발톱은 자라
허공을 약간 밀어냈을 뿐이다
창 너머 크레인의 높이에서 바라본
차갑고도 아름다운 거리
올 장마는 풍성하고 오래 지속된다
누구나 한 번쯤 정물이 되는 때가 있다
한 세계가 열렸다 닫히는 것처럼
나는 영혼이 없는 유리를 지나
쓰러진 나무들을 지나
허공의 문들을 열고 또 열어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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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도
벌레들이 흩어진다 가던 길에서 각도를 바꾸고 길을 봐두었다는 듯이 사라진다 그건 숨을 곳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생존의 각도로 몸을 트는 것이지만 그건 그저 자연스러운
수채 구멍으로, 변기 사이로, 연탄 속으로, 장롱 틈으로, 깨진 창으로, 아궁이의 실금 속으로, 그들은 위고 아래고 틈이 있는 곳은 어디든 몸을 구기고 접은 채 사라지는 것이다
벌레 대부분의 이름들을 그곳에서 알았으나 그들이 왜 가난하고 지저분한 곳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벌레들은 그곳에서 더 우글거렸고 더 혐오스러웠으며 더 유연했다
캄캄한 지하 1호에서 10호까지, 1층 만화가게에서 방앗간 이발소 막걸리집까지, 2층 1호에서 12호까지, 3층 건물주 권씨네 부부 방에서 아들과 딸의 방까지, 회랑을 따라 건물 중간에 놓인 찬장과 짐들, 그 안쪽에 놓인 미지의 숲까지
건물 전체의 투시도가 한눈에 보인다 그들이 움직이던 미세한 길들과 웅크리고 잠든 공간들, 그곳이 그들의 거대한 탑이었음을 긴 여로의 한 정점이었음을, 벌레들이 점점이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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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을 흔드는 손
내 얇은 눈썹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구나
약간 기운 머리와
하늘로 젖혀진 편안한 손바닥
아가야 넌 바람이구나
난 네 꿈을 엿보며
요람을 흔드는 손이란다
아가야
새날인지 옛날인지 알 수 없는
얘기 하나를 들려줄게
「눈이 두 개인 사내」
눈이 두 개인 사내가 50층 꼭대기에 살고 있었단다 사내는 혼란스러웠는지 어느 날 사내는 손에 든 눈알을 던져버렸단다 눈알은 유리 파편과 함께 떨어졌지 아주 푸른 날이었고 떨어지던 눈알은 붉은 빛에 젖어 있었단다 파편 너머의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게 반짝였구나 얼굴의 눈이 마지막으로 본 눈알 그건 소름끼치는 슬픔이었지 떨어지던 눈이 말했단다
「유리」
저 아득한 지상은
목을 긋는 목련들
날카롭게 베어진 입들
터지는 풍선들
유리 끝에 걸려드는
모든 것들은 떨어져나가라
경계가 도드라지는 순간
눈물처럼 반짝일 것이니
한 점씩 뜯긴 하늘아
푸른 피를 뚝뚝 흘려라
눈알은 아직 떨어지고 있는 중이란다 아가야 유리조각 너머 너머로 널 쳐다보는 눈이 보이니 증오하며 세상을 조각내며 그렇게 떨어지고 있을 거야
알 수 없는 꿈속의 아가야
너는 잠시 어지러운 눈이구나
요람처럼 흔들리는 신발들,
원을 도는 조랑말들,
하늘을 날아가는 문어들,
불꽃을 일으키는 범퍼카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난 네 꿈을 엿보며
요람을 흔드는 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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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니 속에 비친 풍경
이 년 전 썩은 이처럼 빠져나간 사내 여자는 사십이 넘도록 방 세 평을 뱉어놓았다 누렇게 웃는 여자의 금니 속으로 방의 풍경이 비춰나온다
한 청년이 안개 자욱한 들판을 헤매고 있다 무림은 늪처럼 깊기만 하다 칼과 칼이 부딪혔을까 청년이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빼어 문다
신경질적으로 비수를 날리는 소녀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익숙하게 응수하는 청년 부엌에선 솥이 끓어 넘치고 성장이 빠른 사춘기에는 쉽게 벽을 통과할 수도 있다
생선은 구릿빛 건장한 여자의 입에서 나와 늘 손 위에서 죽어 나간다 생선 비늘이 칼끝에서 번득이는데 그 풍경 사이로 오는 저녁의 여자 쏟아낸 것들을 위해 먼 길을 되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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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중 / 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이번 <현대시> 신인으로 또 한 사람 1982년생 박헌규(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독하기 어려운 돌발적인 상상력을 통해 의식을 분해하고 그 분해된 의식 " (선자의 평) 세계를 형상화한 시들로서 여기에 굳이 소개하고 싶지 않은 작품들이라서 옮기지 않습니다. -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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