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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송재학의 '모래葬' / 이현승

by 솔 체 2015. 1. 16.

송재학의 '모래葬' / 이현승

모래葬

송재학



사막의 모래 파도는 연필 스케치풍이다 모래 파도는 자주 정지하여 제 흐느낌의 像을 바라본다 모래 파도는 빗살무늬 종종걸음으로 죽은 낙타를 매장한다 모래葬을 견디지 못하여 모래가 토해낸 주검은 모래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 모래 파도는 음악은 아니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빌려 사막의 목관을 채운다 바람은 귀가 없고 바람 소리 또한 귀없이 들어야 한다 어떤 바람은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모래가 건조시키는 포르말린 뼈들은 작은 櫓처럼 길고 넓적하다 그 뼈들은 모래 속에서도 반음 높이 노를 저어 갔다 뼈들이 닿으려는 곳은 모래나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이다 고요조차 움직이지 못하면 뼈와 櫓는 증발한다 물기 없는 뼈들은 기화되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너무 가벼워 사라지는 뼈들은,

― [문학과사회],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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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물질적 기초 / 이현승



들보도 지붕도 없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수직의 기둥만 남은 그리스의 신전에 서면 신神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듯이 사막은 어쩐지 공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모래와 바람이 주인인 사막의 단조로운 풍광은 처참하다고 해야 할 만큼 생략적이다.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 나아가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미니멀한 세계를 드러내 비현실적인 느낌을 만들어 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처럼, 사막이 지니는 극도의 생략적인 풍경은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이데아의 복사물이 아니라 이데아 자체처럼 보인다고 할까? 아마도 관념이나 추상에도 형상을 부여할 수 있다면 사막과 같으리라. ‘생략’과 ‘건조함’은 사막의 형식이자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기와 건기가 미만한 이 세계는 너무나 이 두 힘(열기와 건기)에 충실한 나머지 ‘풍경’처럼 느껴진다. 죽음이, 인간이 시간을 경험하는 최대치의 사건이자 그 자체로 색色을 벗는 일이듯 사막의 주인이 모래와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행위’의 주체를 지시한다. 죽음이라는 관념이 형상을 얻는 장소는 사막이며, 극한의 열기와 건조한 바람은 이 무대의 주인공인 셈이다. 삶의 색이 천태와 만상을 벗고 유유히 음악으로 기화할 수 있는 장소, 삶이 끝나자 곧바로 죽음이 노래로 전신하는 장소, 신화와 관념이 오로지 물질로서 완강하게 날리는 참혹의 존재공간이 사막인 것이다. 만상의 색과 소리가 모래와 바람에 묻히는 사막에서는 ‘죽음’이나 ‘삶’, ‘의지’ 같은 관념이 물질적으로 경험될 것 같다.
이 사막이 “연필 스케치풍”으로 묘사되는 것은 당연하리라. 연필 스케치의 거칠고 앙상한 선, 어두운 단색의 선들은 오로지 바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사구의 능선을 닮았다. 주검이 어쩔 수 없이 부패와 풍화에 몸을 맡기듯 ‘여기’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서의 시간만이 모래로 황황히 나부낀다. 관념의 투사물이나 이데아의 복사물이 아니라 이데아 그 자체가 사막이라는 발견은 송재학의 ?모래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일이다. 오래전부터 그는 ‘풍경’에 예민한 체험자였으며(풍경 속으로 들어가), 치열한 생존의 방식이자 상처로서 꽃과 식물지를 완성한 사람이며, 그의 마음의 첫 순례지가 ‘얼음(차가운 사막)’이었지 않았던가? 그가 섭렵해온 풍경들, 그가 살아낸 상처들이 핏빛 물기를 머금은 ‘꽃’이었다면 아마도 그 꽃의 최종적인 모습은 모래유적이 될 법하다. 모래와 바람을 횡단하며 생을 이어가는 존재들은 모조리 “모래에 묻힌다”(?樓蘭에의 기억?) “양을 몰거나 모래소금을 찾”아 바람을 통과하던 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구부렸던 “등(을) 펴고” 눕는 곳이 그가 목격한 생존의 공간으로서의 사막이었다면, “모래파도”와 “음악”으로 가득 찬 이곳은 죽음이 완성되는 사막이다.
이 모래벌판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는 눈을 뜰 수 없는 모래바람과 살갗을 찢을 듯한 건기와 맞닥뜨려야 한다. 삶의 어떤 물기조차도 증발시켜 버리는 극도의 건조함 앞에서 위력적인 ‘죽음’과 만날 수밖에 없다. 홀로 있어도 그것(삶)은 교교하게 다른 짝을 지시하는 말이다.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인 사막은 삶과 죽음이라는 사실과 벡터를 거느리는 영역이다. 두 개의 상반된 힘이 경합하지 않는 세상은 없다. 다른 두 힘의 충돌과 경합이 없다면 음악(그의 시론에 따르면 “긴장”)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음악을 통해 시인은 죽음이 완성되어 가는 세목을 물질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리를 통해서 공간의 실존을, 모래와 바람을 통해서 이 음악을 번역하는 말의 경제 위에서 죽음의 한 형식이 완성된다.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단조롭고 간헐적이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메우는 주체는 모래의 파도이다. 주검을 묻는 매설자이자, 조심스런 붓질로 주검을 끄집어내는 고고학자이고 살과 색을 뼈와 모래와 공으로 변환하는 연금술사인 모래 파도. 시인은 이 모래 파도가 정지하는 순간을 “제 흐느낌의 상像을 바라”보는 행위로 묘사한다. 이 묘사는 ‘바람에겐 귀가 없다’는 구절과 통한다. “바람 소리 또한 귀없이 들어야 한다”는 구절은 매장과 풍화의 주체로서 모래파도를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바람의 이 덧없는 나부낌조차 음악이 되고 모래가 파도가 될 때 매설과 증발이 반복되는 주검과 뼈는 배가 되고 노櫓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뼈들이 “반음 높이”로 “노를 저어”가는 곳은 “모래와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 고행의 형식으로만 가닿을 수 있는 곳이며 마침내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곳이다. 모래가 사막의 성분이자 모든 삶의 물질적 결정체인 것처럼, 그것은 풍화의 주체이자 풍화의 결과물이다. ‘나’를 버리는 화학적 변화의 최종 심급이 모래이다. ‘죽음’ 이후에도 운동과 저항이 존재하며 여전히 다다라야 할 목적지와 여행이 남은 세계가 사막이다. 살과 뼈가 없어도 흐느낌이 있고, 귀가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는, 느리고 완강한 운동들은 음악과 구도의 형식으로 죽음 이후의 내밀한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모래葬의 ‘모래’와 ‘葬’은 동어 반복이 아니다. 결과와 관념 속에서 그것은 동의어지만, 물질과 운동으로서 다른 벡터를 지닌다. 그리고 이 다른 힘의 경합과 저항이 이토록 경쾌한 음률로 죽음을 그릴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이 내밀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산다는 것은 다만 제 흐느낌의 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자주 움직임을 멈추고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이며 소리를 잊음으로서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귀 없는 음악에 이르는 길이다. 제 뼈를 노櫓로 삼아 삶의 소리들이 파묻혀 버리는 고요를 견딜 수 있을 때, 마침내 바람과 뼈와 모래는 파도처럼 부드러운 일렁임과 출렁거림으로, 마침내 한없는 가벼움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죽음이 막연한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물의 외양과 사물의 본질”을 상관하게 하고 일치시키는 언어의 경지라는 점이 중요하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저항하는 일이고, 상처가 꽃이 되는 일이며, 그러한 역정의 궁극에 음악과 시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 의미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이고 음악일 수 있을 때 시와 삶의 영역은 한계를 벗고 무한히 나아간다. 그러니 왜 사막이냐? 왜 죽음이냐? 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죽음 같은 삶이 삶보다 치열한 죽음이 여기 놓여 있지 않은가. 장葬은 어디까지나 삶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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