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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 문 학 상

2006년 현대문학신인상-가물거리는 흰 빛 (외3편)/이근일

by 솔 체 2015. 2. 16.

2006년 현대문학신인상

 

 

가물거리는 흰 빛/이근일 

 


  병원 침대에 눕자마자 내 얼굴 위로 흰빛이 쏟아진다 심전도기계 위로 드르륵 종이가 말려 올라오는 동안 나는 내 양 옆구리에서 길게 돋아난 핑크빛 지느러미를 보았다 잠시 심해 속을 유영하는 나를 떠올렸던가, 불현듯 내 안에서 고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시간을 품은, 심장 속 그 한 방울의 피로부터 누군가를 부르는 간곡한 울음소리가


  전생에 나는 분홍고래가 아니었을까 일생 동안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이를테면 암초 위에 착생하는 산호;그가 살면서 촉수에 머금는 독에 대해서라거나, 사랑에게 버려진 채 그 독 속에 숨어 지내는 어떤 神의 아픔에 대하여 슬픈 빛깔의 온몸으로 노래하던, 그때도 너는 내 안에 가득 고인 어둠이 두려워 기어이 나를 배반했을 것인가,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사이 내 감은 눈 속으로 캄캄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바닷속 나는 흰빛을 따라가고 있었다 저만치 그 흰빛은 너의 얼굴을 닮고, 또 네 고운 목소리를 닮은 듯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너의 얼굴을 조금씩 뭉개고 지우던 흰 빛, 침묵하며 멀리멀리 달아나던 그 흰빛, 나는 지쳐서 점점 해저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간호사가 다가오고 심전도기계가 작동을 뚝 멈췄다 순식간에 내 눈꺼풀 밖으로 바닷물이 다 빠져나갔지만, 나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 맥없이 파닥거렸다, 침대였던가 뻘이었던가, 가물거리는 그 흰 빛 속에서.


 

 

 

해변의 조각상/이 근일

 

그녀는 나를 조각합니다

마침내 해변에 새로이 <나>가 태어납니다

종일 바다만을 쳐다보며

눈물 흘리는 <나>를 나는 미워합니다

<나>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제 황혼녘의 바다로 떠나간 한마리 잿빛 갈매기를

그리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오지 않은 그녀를 그리워하고

소나무숲을 흔들고 곧 떠나버릴

저 비바람을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그녀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나>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고

심장의 피가 마구 뜁니다

피가 요동치며 붉은 파도무늬의 질투를 조각하는 사이

나는 해변에 서 있는 <나>의 무릎을

망치로 힘껏 내리칩니다

하지만 왠일인지 <나>의 무릎은 깨지지 않고

커다란 신음과 함께 내 무릎이 부서집니다

<나>를 버리고 돌아서자 마자 나는 걸음을 잃고 휘청거립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이근일

 

 

나를 잃고 헤매는 밤입니다

캐럴이 흐르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축제의 불꽃을 터뜨리는 거리에서 나는 그대를 잃고

나무 물고기가 되어 정처없이 흘러다닙니다

길 모퉁이에서 한쪽 날개가 부러진 천사를 보고

따라가다 성당앞에 다다릅니다

나는 거기서 한번 잃어버린 어제의 나를 불러보고

또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어두운 공중으로 날아간 내 메아리는 금세

은빛 종소리가 되어 시계탑아래 녹아내리고

저만치 깜깜한 뜨락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에 문득 달이 환하게 켜지고

별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내가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어느새 긴 지느러미를 나풀거리며 다가온 달빛이

내 한쪽 눈알을 시커멓게 파먹고는

내 기억속의 그대마저 처참히 뭉개버립니다

 

내 몸은 조금씩 썩어갑니다

 

저만치 순백의 눈송이 같아 내 썩은  몸 끌고

가서 보면 잿빛인 별,

달콤한 희망같아서 입속에 넣으면

이내 바스러지는 그 별,

 

 

 

 

 

붉은 방을 꿈꾸는 밤/이근일

 

 

또 하나의 죄를 몸 속에 쌓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사찰앞을 서성거립니다

담 너머 법당안에 연등이 환하게 켜지고

나는 그곳에 등을 돌리고 앉은 부처를 봅니다

슬픔보다 하얗고 차가운 눈송이들이 순간

내 늑골을 마구 뭉개며 밀려왔다, 밀려나가고

나를 에워싼 몇그루 순백의 시간들

사이에서 나는 자꾸 비틀거립니다

캄캄한 허공에 아름다운 원을 그리는 저 한쌍의 새처럼

나는 지난날의 그 붉은 방을 허공에

떠올려 봅니다. 당신과 내가 있고,

막 불을 피운 난로가 있고

우리가 숱하게 지새운 눈물의 밤들이

난로 위 주전자에서 부그르르 끓고 있는

그러나 이내 몰아친 눈보라가

그 붉은 방의 창문을 뭉개고

꼬옥 껴안고선 말없이 더운 김으로 피어오르던

한 몸뚱이를 뭉갭니다

전생에 품은 그 불순한 사랑에 대한 업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쌍의 새가 뾰족한 입을 맞추며 포르르르 떨어져 내리는 밤,

나는 술에 취해 자꾸만 비틀거립니다

눈보라 속에 붉은 한시절 잃고 그만 쓰러집니다

당신을 잃고, 나를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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