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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는 비
신 인 문 학 상

애지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2006. 가을호/박미영

by 솔 체 2015. 2. 15.

박씨 대제가 열릴 때
                                

 

                                                 박미영


박씨 대제가 열리는 날이면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에 빳빳하게 풀 먹인 모자, 지팡이, 태양 빛을 내는 구두를 챙기셨다.
아침 일찍, 힘들어간 어깨를 곧추세우며 대문을 나가시던 할아버지
대제 때면 사람들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능이 생긴다고 했다.
그 분 안경 빛이 사람들에게 반사만 되어도
그 곳에 간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리라.
돌아오셔서 풀어놓는 이야기는 그 분에 관한 보고서가 전부였다.

1979년, 그 분이 박씨 대제에서 모습을 감추자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그렇게 끝이 났다.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5년 뒤 같은 가을날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박씨 대제에 대한 이야기는 5년이라는 공백이 있었을 뿐
84년부터 다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론 더 이상 나는 대제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2005년, 그 분의 신화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하여 하늘에서도 박씨들이 대제 날이면
모여서 음식도 나누고 술도 나누며 한 생 가득 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이승을 그리워하고 있을 게다.

총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하고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 것이
멀리서 외침 같은 것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하는 것이



꽃피는 장날



좌천 오일장에 나와 있는 칡뿌리
털어 버리지 못한 기억까지 고스란히 난전을 펼친다
취나물 봄동 달래 냉이 쑥 곰취 두릅
알싸한 숨소리를 모다 쥐고 있는 보자기 속에서
순한 눈망울이 굴러 떨어진다
와, 함성도 없이
꽃이 핀다
장터를 메우는 노인들 빠진 이빨 사이로
꽃이 핀다
뒷짐 진 등 뒤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꽃이 핀다
여장을 한 엿장수 가위 가락에 맞춰
풀풀 흩날리는 꽃 그림자
가지런히 누워있는 잔파들 사이로
따라 나온 강아지 꼬리에
푸른 지폐에
웃음꽃 핀다
허름한 천막집에서 내놓는 선짓국 한 그릇
장 구경 나온 사람들 뱃속으로 뿌리를 내리며
족히 오일은 넉넉히 견딜  
꽃, 활짝 핀다




꽃나무를 지날 무렵



봄빛이 꽃잎에 막혀 이리저리 몸을 비비며 빈자리를 찾을 때
좌판을 벌린 사람들은 단속 나온 사람들을 피해
꽃잎이 되어 흩날렸다, 꽃나무를 지날 무렵

롯데리아 문이 열릴 때마다 흩뿌려지는 꽃잎 위로
음악이 따라 나와 빙그르르 춤을 추고
그 위로 패스트푸드 같은 웃음이 미끄러진다, 차도 위로
급정거 하는 소리, 꽃나무를 지날 무렵

횡단보도 신호등에 붉은 꽃이 피었다, 푸른 잎이 피었다
종일 피고 지는 자리, 한 세월이 이렇게 잊혀진 듯 깜빡인다
지금은 봄, 다음은 여름
기억나지 않는다, 꽃나무를 지날 무렵

은행나무 있던 자리에 벚꽃나무 심어지고
흔적인 듯 들어선 은행은 지난날의 은행나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좌판이 널브러져 있는 거리를 씻어내는 사람도
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만 제 속을 괄괄 쏟아낼 뿐
은행과 꽃나무와 좌판이 하나의 뿌리에서 피고 지는 걸  
말하지 않는다, 꽃나무를 지날 무렵



공룡 뱃속



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공룡 입안은 상쾌하지도 발랄하지도 않다
새해에 대해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불안은 욕구충족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 내미는 손, 꽉 움켜쥔다
공룡은 입맛을 다시며 혀로 부드럽게 얼굴을 핥아준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손만 뻗으면 빈곳을 채워줄 물건들이 가득하다
공룡 심장 뛰는 소리에 맞추어 우리의 심장도 벌렁벌렁 따라 뛴다
뛰는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우리의 심장이 멈추어도 공룡 뱃속은 아늑하고 따뜻하다
길은 환하고 밝아 주위에 널려 있는 물건들이 아름답게 빛난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없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잠시 두리번거린다
뒷걸음질은 위험하다
수렁은 언제나 뒷걸음질치는 사람을 기다린다
공룡의 내장은 꾸물꾸물 목을 조였다 풀었다 한다
필요 없어도 필요한 듯 몇 개 더 씹지도 않고 삼킨다
게워 내고 싶은 순간
목을 조여 오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역한 냄새가 훅,
문을 나서기가 두려워 진다
즐거운 쇼핑은 즐거운 하루다
공룡 혓바닥이 쓰윽 자기 똥구멍을 핥을 때
즐거운 인생이 끈적끈적하게 우리를 휘감는다
새해는 공룡 똥구멍에서 뜬다



팥빙수와 사내



살이 깎여 나가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달콤함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겨울이지만 찜질방은 팥빙수가 유행이지요
사내는 스낵코너로 와서 다 녹은 얼음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지요
팥빙수 주세요

겨울나무 같은 사내의 수액이
얼음으로 만들어져 팔려 나갔다는 소문이
찜질방 구석으로만 굴러다녀요

살이 깎여 나가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달콤함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그릇에 우유를 부어요 우유는 유혹이지요
얼음을 받아 안고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가슴 밑바닥 어딘가 고여 있다는 걸
우린 알아요

우유의 흔적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내는 간혹
팥빙수를 섞으며 사라진 우유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지요
우유가 보이지 않아요

살이 깎여 나가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달콤함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사내는 빈 그릇에 붙은 한 톨의 팥 알갱이 같은 모습으로
찜질방에 살고 있어요

눈 온 거리에 어둠이 내릴 때쯤이면
사내는 사라지고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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