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반시 2008 상반기 신인당선작
풍선 외 4편 / 권오영
그랜드파더 클락 세븐맨* 외 4편 / 성향숙
풍선 / 권오영
바람 든 내가 둥둥 날아간다
바람의 속도 속에서 나는
가죽이 된다
주머니가 된다
주머니 속에 담고 다녔던
무슨 생각
색깔이나 모양
꽃 이름이거나 사람 이름
이름 속에서도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바람 속에서 바람일 뿐 냄새도 없다
인천서 수원까지 다 오도록
새까맣게 소나기 쏟아지는 날
지갑을 잃었다
젖은 주머니 젖은 바지가 이끌고
가는 길이 낯설었다
그 길 다 지나도록
수십 개의 풍선을 밟고 오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주머니 하나에 다 들어 있었을
빵빵한 것들
내 얼굴과 내 번호
숫자 어디쯤에서 걸리는 무슨 증명
한꺼번에 날아가버린
바람의 증명
나는 나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
나라고 하는 노인이
바람 빠진 주머니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탈피한 벌레집 같은 곳
그 어느 둥둥,
날아가던 한때를 늙은 손이 뒤적거린다
나를 습득한 누군가는 내가 되었을까
뢴트겐의 정원 / 권오영
부서지고 금간 곳을 들여다보며
그는 또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그가 하나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살과 뼈, 그 사이로 여전히 흐르는 피는
X선 사진 속에서 어둡다
어둠 속에서 뼈의 줄기들이 빛난다
빛나는 것들이 환하게 길을 열어보인다
부러진 뼈마디, 시심 박힌 척추
피맺힌 갈비뼈에서 자라는 꽃들
시속 백사십 킬로의 자동차에서 튕겨져 나온 사내
몸의 흔적은 무성했다
살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잎사귀들,
진흙 속을 헤집고 나온 듯한 푸른 꽃들,
살갗을 뚫고 날아갈 것만 같은 은빛 나비들,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들, 눈이 부시게
오랫동안 몸속에 불이 켜져 있다
부러진 뼈마디에 뿌린 씨앗들이 꽃을 피운다
살아있는 시체의 얼굴을 한
핏빛냄새를 풍기는 붉은 정원
형광불빛 아래서 살아나는 낮은 신음들을
하나씩 벽에 건다
벽에 걸린 채 살아나는 신음들을 만지며
그가 달아난 세계를 본다
벌레 / 권오영
눈도 귀도
입도
발도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섭다
어느 구석에서 소리 소문 없이
느린 속도로 기거나 걷거나 뛰면서
숨죽이면서 소리를 갉아먹고
냄새를 포식하면서 배불러 오는 것
그것이 겁나고 무섭다
흔적도 없이 진군해 오는
열려진 귀로 열어놓은 콧구멍으로 땀구멍으로
배꼽으로 구멍마다 구물구물 들락거리는
밟고 지나가는 길들이 무섭다
날개를 달고 어느 날
내가 가보지 못한 거리까지
내가 디뎌보지 못한 길목까지
휙휙 날아다니는 날개가 부러운 것들
살충제로도 죽지 않는 튼튼한 내성
구석구석 내밀하게 집을 짓는
쌀알 같은 새끼들을 데리고 끼어드는
구멍 속 집이 무섭다
낭새* / 권오영
가시 달린 나무들 우거진 숲, 벼랑 있다 파도가 조금씩 파헤쳐놓은 벼랑, 깃털 없는 새끼들 꺅꺅 울어댄다 해독할 수 없는 울음들, 치마를 꿰메고 앉아있는 노파처럼 모래
위 뚜렷한 발자국을 바다가 지운다 발자국이 새로워진다 한결 같은 해안선과 섬 사이, 급류에 맞서 바다의 근육이 단단해진다 스스로 부딪히며 깊어지는 바위들 가파르게 자신의 깊이를 재고 있다 벼랑을 이룬 바위 틈 자갈처럼 박혀있는 새알들, 둥지에서 기어나오는 새끼새들 낭떠러지 두려운 새가슴들, 퐁퐁 바다로 떨어진다 썰물이 그것들 실어나른다 새집 속 알껍데기에서 묻혀 온 푸른 울음, 늙은 새 섬으로 들어가 숲 전체를 품는다 가시 덮인 덤불 숲 울음소리 익어간다 독버섯과 가시나무들 사이 왕복한다 반복한다 봄이 다시 지나간다 여기 가시나무 열매들 바닥을 누볐다, 지금 어미에겐 그 어떤 숲의 지점도 중심이다, 스스로 벼랑이 되는 법을 익힌 새 운다 바다가 샅샅이 섬을 뒤지며 들어온다
누가 더 오래 기억하나
이 많은 가시들, 이름들, 낡은 악기처럼 깃털 없는 새 울음들
*바다직박구리를 낭새라고도 부른다
침대 / 권오영
예순이 넘도록 수십 년을 누워만 지내온
석고인간 김씨
굳어져가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손거울에
주름진 이마와 움푹 패인 눈동자가 들어찬다
거울 속 눈동자가 이동한다
여러 개 침대가 놓여진 복지관 방 안
눈동자 속에서
1번 침대 할머니가 기침을 하고 있다
얇은 모포가 풀썩인다
끊임없이 쿨럭이는 기침이 희끗희끗
하얀 할머니를 들춰낸다
약을 먹어봐요, 거울에 대고 그가 말한다
그가 또 오그라진 손으로 거울을 틀어쥔다
2번 할머니가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있다
여기 좀 봐요, 그가 손짓을 한다
할머니는 천장만 쳐다볼 뿐 대답이 없다
3, 4, 5번째 할머니가
잠든 후에야 손거울을 놓는다
간간히 들리는 발자국소리에 깨어난 새벽
손거울을 틀어쥐는 동안
흰 마스크를 한 사내들이 2번 할머니를 옮겨 눕힌다
할머니가 침대에서 사라진다
한동안 거울 속에 놓여있던
빈 침대도 사라진다
굳어져가는 딱딱한 몸
간신히 손가락에 끼워진
손거울 속에 나무와 언덕이 들어찬다
눈동자 속에 새떼들이 날아간다
그가 거울 속으로 하나하나
침대들을 불러들여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그랜드파더 클락 세븐맨* / 성향숙
일곱 마리 굴뚝새의 합창 들어봤어? 무심코 들여다보면 마치 한 마리가 노래하는 것 같은, 일곱 남자가 들어있는 시계 뱃속. 일곱은 너무 많아 엉덩이끼리 부딪히고 머리를 박는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남자들의 움직임은 일초씩 완성된다. 보일까 말까 남자만 일곱 거느린 사내. 자주 배가 고프다. 이것은 살아있는 자의 절대적인 비애다.
다섯 시 정각에 알람이 울리면 눈뜨지 않고 즉시 소리를 죽일수 있다는 것, 반복학습의 결과지. 변기 앞에 삐딱하게 서 마지막 한 방울의 오줌을 털어내야 비로소 사내의 의심스런 아침이 혐의를 벗는다. 늦거나 이르거나 상관없이 하루는 시작된다. 약간의 잠 흔적과 서서히 풀어지는 햇살이 오후와 연결되면 자기도 모르게 오후를 닮는, 프레스는 습관적으로 바닥을 친다. 헐렁한 뱃살에 저항하는 벨트를 연결하고 온종일 몸을 흔들어주어도 열한 시에 벨 눌러달라는 연서는 가슴을 울리지 않는다. 젖꼭지 같은 초인종을 눌러도 여자가 연상되지 않는다. 두근거림은 젊음의 특권인가?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이 열린 문을 닫아 건다. 허공에 매달린 전등에 목을 매달고 눈뜬 밤을 자살하는, 짧은 타악기소리와 함께 열두 번의 괴성을 한꺼번에 토하는 사내. 그 소리는 내면의 일곱 남자가 한꺼번에 우는 울음이라는 걸 누가 알까? 투명한 어둠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죽었다가도 다시 정확한 박자를 세는 세븐맨.
일초도 쉬지 않는 움직임은 천백 시간 이어지고 쌓이는 먼지처럼 또 배가 고프다. 하루는 지루하다. 흰 머리칼 무성한 사내는 기약 없는 연서를 보내듯 왕성한 식욕을 드러낸다.
*시계박물관에 전시된 시계. 시계부품 곳곳에 사람 모형이 붙어 있다
유리알 유희 / 성향숙
바다는 푸른색 유리알
사내가 손바닥 위에 출렁이는 유리알을 올려놓네
조명은 유리알을 집중하고 유리알은 그 빛을 반사하네
전등은 움직이는 유리알의 정점을 비추지만
항상 그 자리에 정지 한 것 같은
유리알은 온몸이 그대로 정수리네
자세히 들여다 본 단단함 속에는 수많은 기포가 숨어 있네
수억 생명들이 내뿜는 가쁜 숨을 가두고 있네
입 한번 벌리지 않는 사내의 유리알은 말이네
처음 내뱉는 말처럼 유리알이 공중에서 사라지고
검은 모자를 벗으며 살찐 비둘기 키세스 초콜릿처럼 뒤뚱거리네
쥔 손을 펴자 어린 개구리가 긴 다리를 늘이고
그 다리를 훑자 한 송이 장미의 문장이 완성되네
하얀 보자기 위로 구름이 피어오르며 직물 같은 비가 내리고
사방에 기포알 흩어져 지느러미들 유영하네
공중회전할 때 정수리와 정수리를 잇는 붉은 빛은
물살을 끊임없이 뒤로 밀어내고
부푸는 불빛은 밀리는 물결 속에 몸이 푹 잠기네
끝내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네
사내가 한 점 배설물처럼 다리 사이로 유리알을 떨어뜨리고
푸른 빛을 휘감으며 잘못 뱉은 말이 바닥을 구르자
거친 숨소리들이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네
거친 파랑에 숨죽인 사내들과 여자들의 눈알이 거품처럼 닫히네
알아들을 수 없는 천의 말들이, 백가지 문장들이
흰 버캐를 물고 절규하는 듯
차가운 혓바닥을 둘둘 말아 철썩 철썩 해변에 펼쳐놓는
사내의 손길에 수도 없이 긁힌 푸른 바다를
한 여자가 가만히 들여다보네
달력 / 성향숙
나는 땅에 발 딛고 산 게 아니라 달 속에 살고 있었다
수면제 삼십 알을 삼키고 잠이 들었어
문이 완전히 닫힌 어둔 몸속에 수면제 한 알 만큼의
빛이 새어 들어와 자라기 시작했어
하루하루 빛이 자라 몸속은 터질 듯 환했어
몸속에 보름달 떴구나
그후 신기하게도 몸에 빛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어
그건 내가 세상에 눈을 뜬 순간이었어
내가 너를 낳고 네가 나를 낳는 달은 엄마처럼 노련하다
자오선을 통과하는 달 속에서
비명소리와 신생아 울음소리 섞인 태양이 태어나고
죽음이 방문하는 날엔 밤에 밝은 태양이 뜨기도 해
파편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태양과
몇 개의 출생을 담은 태양이 듬성듬성 떨어지지
사소한 차이로 생과 사를 밀고 당기는
뜨거운 태양과 차가운 달은 박빙의 시간을 건너지
때론 달 속에 갇힌 태양이 몸부림치기도 해
달 속에서 삼백육십다섯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잠을 자지 않아도 꿈이 자라는 밤
한 달에 한 번씩 하늘에서 달이 태어나 자라고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길게 누운 몸 위로 빛은 넘쳐흐르고
나는 몸때가 온것을 짐작하여 떨어질 태양을
하나하나 짚어보게 돼
輪藏臺 / 성향숙
티벳에서는 언덕 위 바람이
깃발에 적힌 깨알 같은 경구를 읽고 지나간다고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내 앞의 너를 다 알았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윤장대를 한 번 돌려 팔만대장경을 읽는다
또 한 번 돌려 그 바람을 읽는다
멀리서 소문으로만 읽었던
날 천천히 돌려 세우던 낯선 할머니
찌그러진 눈을 가늘게 치켜뜬
그 할머니는 나의 무엇을 읽은 걸까?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짚으며 이름 하나 중얼거린다
바람에겐 모든 것이 경전이다
내부의 뜨거운 음계를 조금씩 짚어가는
지루한 경전을 읽듯 얼굴을 끊임없이 스친다
옷깃을 열고 사라진 경전을 다시 꺼내놓는다
작은 털주머니 찢고 순백의 꽃망울 내밀다가
부챗살 잎을 펼치는 창밖 목련나무가
햇살 끌어와 몸을 비추는 가는 줄기마다 차례차례 잎을 펼쳐내는 것
후진하는 깜빡이 눈알이 천방지축 아이들을 잘도 피하는 것
양떼가 되었다가 새털이 되었다가 일그러진 성난 얼굴이 되는
구름이 우울의 무게를 하루종일 내려놓는 것
벌레처럼 지구표면 위에 서서 바람을 읽는 모든 것들
바람 한 번 스침으로
어떤 열기가 단번에 내 안에 들어오기도 한다
나무가 흔들리지 않는 히말라야는 그림일 뿐
지구본의 베링해협은 험난한 물살도 없이 돌아갈 뿐
네 주위를 서성이는 마음으로
티벳 사원에 세워진 기도륜을 돌린다
경전을 읽었다고도 안 읽었다고도 할 수 없는,
보름달 / 성향숙
세계가 유리처럼 반들반들하다
네 큰 눈망울이 글썽거리는 것 같아
눈물 한 방울 땅바닥에 떨어뜨려 슬픔의 물방울 꽃 피우려나
거울을 보고 우는 눈물의 여왕처럼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눈 속으로 눈물을 끌어모으고 있다
한쪽 눈밖에 볼 수 없으나 넓은 미간 끝 다른 눈에선
눈물 한 방울 먼저 떨어져
피레네 산맥을 거쳐 수에즈 운하까지 흘러내리고 있을지 몰라
언제나 연속극은 해피엔딩이고
벽엔 박제된 웃음을 걸지만
눈을 뜨면 잠자던 불행은 두더지처럼 튀어올라
가로등 밑 강낭콩은 결핍을 감아오르고
빛에 젖은 새는 제 어둠을 지상에 떨어뜨리고 날아간다
여전히 대낮인 줄 알고 화분 속을 부지런히 드나드는 일개미떼
새벽 세시에도 전화벨은 몇 번씩이나 울려대며 묻는다
콜택시죠? 콜택시 아니에요?
저기 연기를 피우는 굴뚝 좀 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굴뚝 속으로 자지러드는
구름의 상상도 달 속으로 향하는지
환한 저 뒤쪽의 상상은 이곳으로 반사되지 않는다
날선 구름이 눈동자를 자르며 지나간다
여자가 눈물 한 방울 그렁그렁 매달고 살짝 눈을 감고
눈물 속에 잠긴 지붕들이 찰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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