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탄천에서> 외 4편
금기웅
양재천 한강으로 흘러드는 모래밭
늦은 겨울 저녁을 걸었다
바람이 한 떼의 갈대 숲을 지나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흔들며 지나가고
건초들 마른 품속에 둥지 틀었던
청둥오리는 아직 제 길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층 빌딩을 한번 휘감은
저 서북 뒷바람이
건조한도시의 언덕에서 뒹굴거나
깊은 강심 마구 흔들어놓아도
지난 장마의 쓰린 기억으로 남아있는
갈대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대로 섰다
다만 크게 자라지 못한 청둥오리 떼만
이따금씩 검은 하늘을 제자리 걸음으로 떠돌 뿐
저녁 틈새를 헤집고 들어온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흔들어대도
시간은 비워진 강가에 얼어붙은
음산한 죽음들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정지해 있다
문득 갈대가 보이지 않는다
<떠나는 기억들의 저장은 완강하다>
아침 햇살이 안경 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빛은 힘을 준다
찬바람에 다리 후들거리는 갈대들 아래로
물은 주름을 만들며 조용히 제 길을 간다
모래도 퇴적층으로 제 그림자 그리고 있다
따스한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른 땅 깊이 박힌 풀씨들을 부지런히 쪼아대는
철새들 바라보면 눈물난다
그들도 일부러 눈물흘리지는 않는다
때가되면 떠나야 하는 우리와 닮았으므로
강물속의 철새 두 마리 움직이지 않는다
전신으로 찬바람 받으며
두발 흐르는 물에 견고히 박고 섰다
제 몸까지 저장하는 것일까
머리는 목 깊은 곳에 숨겨두고
바람에 온 깃털 날리도록 맡겨둔 채
깊은 법열에 빠진 것일까 떠나기 전에
이곳의 모든 기억들을 온 몸에 저장하는 중일까
내가 이렇게 심하게 떨며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나도 그에게 저장된다
오늘 내가 이곳에 와서 그의
마음 근처를 배회하리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
떠나는 기억들이 저장은 의외로 완강하다
<흑백사진>
희뿌옇게 된 흑백사진 한 장 펼쳐 있다
배경은 눈부신 흰빛으로 덮여있고
빽빽이 식재된 주검처럼 보이는
저 검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 걸어 들어가면
또 폭설 쏟아지려는 듯
하늘은 구름 뒤집어 쓴 채 내려다 보고 있다
내가 응시하는 만큼만
모든 것들은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저 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두꺼운 덮개들을 뚫고서
가장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순간은 지금 이때다
발 밑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아이젠 눈 긁는 마찰음들을 끌면서
산을 내려올 때
심장 더워지고 등허리 땀 조금 맺혔을 지금 이 순간
어째서일까?
내가 편안히 누워있거나
벽에 등 기대면 전혀 보이지 않던 저것들,
깊은 내면에서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던 그것들
하산의 고통과 만나 함께 어깨동무하듯 헤어나오면
비로소 세상밖으로 나오고 있다
희뿌옇게된 흑백사진 한 장으로 인화된
삶의 내부들이 겨울 하늘에 걸린 채 펄럭거리고 있다
<세월>
터널은 바퀴자국을 내장으로 안고 있다
입구부터 낮게 가라앉아 있던 두려움도
일단 첫 바퀴 들여놓으면
고개 숙여 제 발 밑 내려다 보는 궁륭의 불빛 따라
도로는 한쪽으로 몸 기울어져 있다
출구 쪽 희망 가리키고 있다
이리저리 꼬인 창자를 순탄하게 통과할 때는
즐거운 기억들만 꿈꾸지만
온통 막혀 제 약속시간 놓치게 될 때는
급성 장염처럼 끓어오르는 매연 가득 마시면서
아무런 기대조차 없이 한 시절 보내야 한다
어떤 사물들도 담겨 있던 견고한 궤작들을 빠져 나와
허공을 떠돌다가도
어느날 문득 제 모습 찾아가 보면
이미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나 더 닳아져야 편안히 사라질 수 있을까
버티다보면 더 빨리 마모될 뿐
우리가 낡은 운전석에 앉아 떠들며 길들 지우는 사이
제살 깊이 파인 터널은 흐느낀다
드디어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
도시의 휘황한 불빛을 건너 세월은 폭주족이 되어
누구의 마음속으로든 빠르게 질주한다
<안심>
툭 떨어진 밤 한송이
등산화로 눌러 보았다
터진 빈 껍질 속의 욕망만 바닥에 뒹굴었다
맑은 햇살 쪼이며 몇 개의 잎새로 버티고 있는
가을 밤나무 뒤에서
까만 청설모 한 마리 조그만 입으로
껍질 터진 가을 하나 가득 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쳐다복 있다
의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미소를 보내자
내 안심을 그제서야 보았는지
그 둥근 시간을 두손으로 안고
이리저리 굴리며 껍질을 깐다
낙엽을 깔고 앉아
이제 온산 가득 쏟아져 나오는
말의 잘 익은 알맹이들을 먹는다
놈은 내 미소 냄새를 맡았고
대신 나는 놈이
둥근 시간이 되어 가는 걸 훔쳐 보았다
서로 안심을 나누었다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이 수 정>
<비곗 덩어리> 외 4편
두 눈을 비벼도 맑아지지 않았다. 언제나 반투명의 유리가 앞에 있었다.
햇살은 비 현실적이었다. 기형으로 투사된 햇살이 망막에 닿고 있었다. 입
술을 대어도 기름이 뜨지 않는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식은 땀이 났다. 무
엇을 잡아도 미끄러웠다. 청명한 하늘을 보고 싶었다. 고추 잠자리 날개의
무늬를 만지고 싶었다. 댓잎을 헤치는 바람소리를 세밀히 듣고 싶었다. 정
신의 끝자락에 비곗덩어리들이 허이옇게 붙어있다. 두눈을 아프게 비벼야
한다. 비대한 나는 부들부들 식은 땀이 났다. 관념의 살 저쪽에 허이연 지
방이 쌓이고 있었다.
<겨울 아침에 >
몇마디 말들이 바람에 불려갔다 낙엽 속으로 숨어들었다 초침이 햇살을 밀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며 바람에 굴러갔다 까맣게 타들어 가고있었다 관자놀이에
서 검은 재가 묻어났다 지워지지 않았다 치약 냄새나는 아침 文章이 하나 발
밑에 구르고 있었다 거미줄이 반짝였다 겨울 아침이었다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억새 >
수십 개나 되는 손가락들이
샅샅이 움켜쥔 머리칼에서
신경은 쉽게 끊어져 내렸어
검은 문이 닫혔어
아름다운 손들이 흔들렸어
무릎이 빠지는 습지 너머
아름다운 손들은 푸르르 날아올라
석양 쪽으로 날개를 펼쳤어
어둠과 끌어안은 노을 뒤로
나는 그림자가 흐려진 채
무릎이 빠지는 습지에 서 있었어
뼈가 드러난 손들이 가득한 곳이었어
달은 하얗게 떨며 전화벨 소리를 냈어
벨소리가 날 때마다 별은 멀어졌어
가물거리는 별은 볼수록 구분이 되지 않았어
난 아팠어 유성처럼
달아나고 싶었어
<아스피린 먹는 사람 >
비가 내린다 밤비가
나뭇가지를 스친다
일 만개의, 일만 오천 개의
잎들이 앓는다
기침 소리가
어둠의 한 쪽을 찢는다
가는 비명이 비명을
끌어안는다 섞인다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들판 하나가 비바람에
휘 몰리고 있다
기침 소리가 땀에 젖어있다
열에 싸인 사람의
젖은 숲으로 하이얀
아스피린 한 알 녹아들고 있다
<마른 날의 꿈 >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빠지는 늪이었어
검은 문들은 작아지고 있었어
문밖에서 들려오는 이명이
끊어졌다 이어지곤 했어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빠져드는 거기
검은 우렁이들이
달팽이관 가까운 빈터에
정신없이 자고 있었어
질퍽이는 습지 곳곳에
부레옥잠들은 흰 꽃을 환하게 피우고 있었어
꿈틀거리며 검은 거머리들이 기어가고
우렁 껍질 속 맨 살이
보드랍고 따스한 양지를 꿈꾸고 있었어
<신인공모작품 예심 심사평 >
신인응모 작품은 진짜 신인 다워야 한다
8백여편의 신인응모 작품들을 읽었다. 새로운 얼굴의 시를 만난다는건
즐겁고 기쁜 일이므로 한편, 한 편, 열심히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 새롭고 참신한 시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다.대개가
또박또박 시의 길을 걷거나 걸어가고는 있었지만 정신을 훨훨 날아오르
게까지는 하지 못하였다. 신인다운 새로운 시각과 매서운 북풍설한의
차가운 바람소리 같은게 없었다. 신인응모 작품은 진짜 신인다워야 한
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어른이 되려는 아이의 성급한 마음들이 시 곳
곳에 묻어 오히려 시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한용숙, 김향라, 백석희 등의 다소 잘 닦여 반짝이는 창문들을 만나긴
했으나, 시를 쓰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마음이 너무 흥분되어 오히려
시의 투명성과 선명함을 약화시켜 버린 것 같아 아쉬웠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쓰고 잘 만들 수 있을까에 급급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한 신인다운 치열한 패기와 개성들이 부족했다. 시는
머리와 손으로 짓는 공중 누각이 아니라 몸과 영혼으로 한 발 한 발 딛
고 가는 삶, 그 자체여야 한다. 그래야만 시의 뿌리를 좀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고, 좀 더 큰 마음으로 시의 뿌리를 격려할 수있다. 그래야
만 이 우주에 널려있는하찮은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에도 더 없는 사랑
과 깊은 통찰력을 느껴 샘 솟는 지혜의 영감을이끌어 낼 수 있다. 시는
답습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만 안다면 누구
라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금기웅, 엄재국 등 여러분들께도 자신에게
도전하는 마음과 정시으로 더욱 열심히 치열하게 다시 한번 시작업에
정진하기를 바란다.<김상미>
기교와 인식
신인다운 패기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기 어려웠다.
소재와 발상이 참신한 작품들은 그에 따른 사유의 깊이와 무게를 확보하
지 못하고 있었다. 산문적 형태의 시들도 많았는데 전체적으로 긴장과
탄력이 부족했고, 구성의 밀도 또한 떨어졌다. 현학적이고 장식적인 비
유가 자주 나오는 시들도 많았다. 비유는 단순히 기교의 차원을 넘어
인식의 차원에서 이뤄질 때 그 빛을 발하는 법인데 응많은 응모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물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묘사를 주무기로 삼은 시들은 사물 자체를
넘어서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역동적 상상력이 부족했다. 난해한 시
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런 시들에 대해서는 시점과 독법을 바꿔가며
여러차례 읽었다. 그러나 대부분 좋은 시인데 난해해서 해독할 수 없
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아서 난해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철학이
나 종교에 관계된 용어를 쓴다고 철학이나 종교가 시에 담기는 것은 아
니다. 시가 철학적 수사를 하고 있는 것과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피상적 느낌만을 장
황하게 나열해 놓은 시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주로 대상과 인식 주체인 창작자와의 적절한 거리조정에 실패했기 때문
이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던 것은 상당수 응모자들이 언어와 리듬에
대한 깊은 인식과 섬세한 통찰없이 메시지 전달에만 온 신경을 쓰고 있
다는 점이었다. 시는 대상과 세계에 대한 진술 이전에 언어다. 시 속에
서 언어와 언어는 조응하면서 혹은 대립하거나 서로를 부정하면서 리듬
을 형성하고 멜로디를 만드는데 이 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했다. 오
랜 고심 끝에 한용숙의 스웨터 외 9편. 김향라의 「亞字房 가는 길」외
10편, 엄재국의 「포유」외 20편을 후보작으로 밀었다. 한용숙은 응모작
전체가 일정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시어 운용과 적절한 감
정 절제가 장점이었다. 쉽지 않은 삶의 수렁을 건너오면서 오랜 습작기를
거쳤음을 짐작하게 할 만큼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안정감이 자신의 시
세계를 가두는 새장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좀 더 다양한 소재
선택과 발화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엄재국의 몇몇
시들은 높은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으나 함께[ 보낸 나머지 시들과의
편차가 심해 한참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 김석봉, 박일만,
박홍점의 시들도 관심있게 읽었다. <함기석>
부감구도(俯瞰構圖)와 美的 現代性
동양예술의 원리를 설명하는 말 중에 부감구도(俯瞰構圖)라는 것이 있다.
부감구도는 서구의 원근법적 표현의 vued' oiseau 같이 모든 대상을 상정
된 일시점에서 내려다보고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무대 설
정이다. 이때 형상화 되는 풍경은 멀리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축소된 세계
라 할 수 있다. 부감구도의 원리는 일방적인 주관성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도식적인 사실성을 거부하여 하이쿠와 같은 동양문학의 미적 기준을 시사
하기도 한다. 이러한 원리 속에서 순간과 영원은 함께 있으며 주체와 타자
가 몸을 섞는다.
오늘날 현대시에 맞는 새로운 부감구도를 생각해 본다. 여러 맥락에서의
위기에 처한 한국 시는 유폐적인 주관주의와 도식적 객관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그 승화된 양자를 창조적으로 융합하는데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적 현대성이다.
21세기 대다수의 시인들은 세속 도시의 황막한 현실 위에 그 피곤한 몸을
눕히고 있다. 자연의 황폐화를 초래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시인은 항상 다른 방식에서 생각하여 새로운 풍경을 재창조해 나가야 kf
것이다. 이런 생각에 젖어서 심사에 임하였다.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이르는 예심 과정은 고통스럽고도 신성한 제의의 시
간이었다. 이 축제를 관장하는 사제가 된 기분으로 일흔 세분의 응모자가
보낸 천여편의 시를 통독하였다. 예심위원 셋이서 우선 대여섯편씩을 천거
하였으며 그중에서 열분의 예심통과를 전원일치로 결정하였다. 나는 특히
박일만 한용숙 김향라 우이정 채수인 금기웅, 반진성 씨의 작품에 호감을
가졌다. 이분들의 시는 세계와 자아를 소통시켜 나가는 방법에 무리가 없고
문학적 기교에도 충실하였으며 주제도 투명하여 시의식의 진정성을 확인시
켜 주었다. 한편 대다수 응모작들이 오랜 습작기를 거친 안정성과 완결성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분의 작품은 기본적인 국어 정서법조차 터득
하지 못한 천박함을 드러냈다는 사실도 지적해 준다.
시인은 너무 많고 시는 너무 읽혀지지 않는 참 이상한 세상으로 세 시인을
내보내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름답고 풍성했던 밤의 축제가
내 오래된 비관주의를 잠시나마 불식시켜 주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저주
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라는 어느 프랑스 시인의 전언을 생각하며 응모자들에
게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김종태>
((예심 심사위원 : 김상미, 함기석, 김종태))
신인작품공모 본심 심사평
詩性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을 우선 꼼꼼하게 읽었다.
김향라, 한용숙, 박일만, 우이정, 홍우진, 채수옥, 박석희, 김석봉,
박홍점, 유가형의 시편들을 예심 심사위원들이 뽑아주었다. 이들 가운
데 한용숙, 박일만, 김향라의 것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한용숙의 <밤의 딱딱한 심장에 어머니의 대바늘이 수없이 구멍을 내자
창밖이 훤해지고 있었다>('스웨터')와 같은 대목과 박일만의 <햇빛과 정
분나눈 몸빛이다/가지마다 증명하는 푸른 지문 솟는다>('점경'), 김향라
의 <빛에 갇혔던 조리개를 열자/달맞이꽃 노란 날개 팔랑이는데/만개한
달빛 걸터앉네>('강진편지')와 같은 부분들에서 이들이 획득하고 있는 詩
性과 그간의 詩歷을 감지할 수 있었으나 심사위원들은 좀 더 욕심을 내어
예심 탈락자들의 것들을 다시뒤지다가 이 수정의 비곗덩어리, 금기웅의 '
떠나는 기억들의 저장은 완강하다' 등의 작품들이 예사롭지않음에 동의했다.
예심 선정 작품들이 지나친 시의 몸짓 탓으로 어딘가 경직되어 있고 산만한
데 비하여 이들의 작품들이 완결성과 투명성을 시의 본성으로서의 서정성을
그리고 시의 비의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요즈음의 시
들에서 흔히 보이고 있는 시의 유형화로부터 해방될수 있는 가능성을 이들
에게서 발견했다.
이수정은 자칫 보편적인 울림으로끝나기 쉬운 서정을 절제와 긴장으로 금기
웅은 진술로 끝나기 쉬운 사실적 체험 속에 내장된 빛(정신)의 에너지를 깨달
음으로 자리바꿈해 내고 있어 믿음이 갔다. 두사람
의 정진을 기대한다. 시성은 모습을 달리할 뿐 언제나 본체로 있다. / 정진규
투명성과 완결성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과 예심 탈락 작품들을 다시 읽었다. 그 가운데서 마
지막까지 논의된 것들로는 이수정씨의 '아스피린 먹는 사람', 금기웅씨의 '다
시 炭川에서', 박일만씨의 '點景', 김향라씨의 '亞字房 가는 길' 한용숙씨의
'스웨터'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이 수정씨의 작품과 금기웅씨의 작품을 당
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들간에 이견은 없었다.
이수정씨의 작품은 무엇보다 언어가 잘 정제되어 있고 투명하다. 시상도 완결
되어 있다. 불필요한 말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시의압축미와 긴장감을 잘 살린
것이 장점이다. 내면의식을 감각적으로 형상화 하는 이 시의 방법이 특별하게
독창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이미지의 구사가 신선하며 아름답다. 미학적
차원에서는요즘 젊은 시인들 가운데서 이만한 작품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앞으로 이에 만족하지 말고 삶과 세계에 대한 명상적 깨달음의 경지를 펼쳐
보기 바란다. 훌륭한 시는 아마도 미학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야 할 것이다.
금기웅씨의작품도 절제된 언어와 형식의 완결성이라는관점에서는 이수정씨의
작품과 비슷하다. 그러나 메시지 전달이라는 측면이 보다 강조된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풀어진 듯한 느낌이다. 메시지를 보다 함축된 형상성으
로 제시했으면 보다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사물에 대한,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인간적 고뇌가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다.
박일만씨의 작품은 사물의 한 국면이나 상황을 시적인 시선으로 잘 묘사해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진술이 산만하다는 느낌이다. 김향라씨의 작품은
언어가 압축되지 못하였다. 불필요한 묘사가 장황해 보였다. 한용숙씨의 작
품 역시 사변적이다. 길이를 절반정도로 줄였다면 어떨까. 시는 꼭 필요한
말만 해야 한다. 아니 필요한 말조차도 가능하면 생략해야하는 것이 시의 숙
명이다.
/오세영
맑음과 든든함.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 보는 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겠지만 시 속에 삶과 진
실이 잘 들여다보이면서도 음악이 들리는 시, 사물과 대화하면서 그 관계가 새
롭게 살아 형상화되어 생동감을 줄 수 있는 시가 아닐까.
심사대상에 오른 작품들은 이런 면에서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을 확보하고 있어 시대가 시에서 멀어진다는 기우를 지우기에 충분
했다. 작품의 수준도 그렇지만 신인작품 응모 열기가 점점 높다고 들었기 때문이
다.
본심에 오른 다섯사람중에서 박일만은 서정의 따뜻함과 그것을 시로 엮어내는 힘
을 상당부분 갖추고 있었다. 김향라 또한 시를 시 답게 만들어가는 그 통솔력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현실과의 시적 조응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 두사람
은 일정한 수준에도 불구하고 당선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주었다.
정확한 시적 표현, 언어를 선택하고 닦는 기량이 아직 다소 미흡해 보였다.
당선에서 내려졌지만 선자의 눈을 끈 것은 한용숙의 '스웨터'였다. 이 시가
거느리고 있는 생활과 서정의 적절한 교직은 어떤 부분 상당히 빛나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의 전체적 면이나 다른 시들이 그에 미치지 못
해 아쉽지만 다음을 기대하기로 했다.
결국 이번 당선의 영예는 이수정과 금기웅에게로 돌아갔다. 금기웅시의 저
력과 깊이는 오랜 시적 수련의 진실성이 잘 녹아 있어 그가 지니는 서정의
무게를 돋보이게 했다.
이수정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엮어낸 언어의 연금술 그것이다. 이미 시의 비
의를 알아버린 듯한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맑은 목금의 음악이튀는 이슬 소리
가 들린다. 절제와 긴장, 그리고 아픔까지도 시 속에서 소화하여 반짝여내는
능력은 새롭고 탁월하다.
이번에 당선되지 못한 분들의 분발과 함께 두분 새 시인의 당선과 그 출발을
축하하며 큰 나무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 이성선
<본심 심사위원 : 정진규 오세영 이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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