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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우리 시의 현장] 환절, 존재 변환의 사이 / 이훈

by 솔 체 2015. 3. 28.

[우리 시의 현장] 환절, 존재 변환의 사이 / 이훈

새로운 형식의 격월평 _ 토파즈빌 통신,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신들의 놀이터/ 강인한 

 

토파즈빌 통신 / 강인한

 

 

주방의 쪽창에 비치는 풍경이 덜컹거린다

토파즈빌 114동과 토파즈빌 115동

저 두 개의 건물 사이 옹색한 얼굴로 산이 끼여 있고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사계가 지나간다

나는 설거지하는 아내의 어깨 너머로

눈 내리는 겨울을 보았고

색맹검사표같이 어지러운 눈발 속

모든 새의 이륙과 착륙이 금지된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느티나무가 내려다보는 놀이터에

그네가 매 맞는 나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빗속에 승용차에서 내려 얼른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가는

여자의 품안에 개가 안겨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토파즈빌 114동에서도 115동에서도

비가 오거나 말거나 열심히

고가사다리차가 이삿짐을 실어 내리고, 실어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무상하고 유수와 같았다

절뚝거리며 벚꽃이 날리는 것이 보였고 그래서

설거지하는 아내의 등뒤에서

푸짐한 허리를 가만히 안아보다가

저리 비켜, 발부리에 채인 강아지처럼 나는

유순하게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황사와 함께 돼지독감이 입국하는 건 시간 문제라는데

내가 사는 토파즈빌 113동의 주방 쪽창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유유히 외출하는 여자가 보였다

하릴없이 나는 풍경을 갈아 끼운다, 잔뜩 근엄한

최고통치자의 지당한 유시가 웬일로 코미디 대본으로

착각되는 때가 많은 환절기였다.

                                                      —〈문학의 문학〉2009년 여름호

 

 

풀밭 위의 점심 식사 / 강인한

 

 

여러분의 자랑스런 후일담이 되어드리려고

벌거벗고 앉아 있어요,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의 고양이가 되어

땅 속으로 땅 속으로 두더지가 한사코 땅을 파듯

저 멀리 흐르는 강물 소리엔

꿈의 운하를 파는 삽질 소리가 암암리에 섞여 있지요

내 곁에 한쪽 다리를 뻗고 느긋한 파트너는

토요일까지 죄를 짓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사함을 받지요, 그리고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깨끗해지지요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물려받을 주식에 대한 생각들을 인화하기 위해서

내 얼굴의 턱을 괴고 있어요

거리에서 떼쓰다가 불타 죽은

못된 불량배들에 대한 헛소문은 믿지 마세요

감춰진 샅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숲속

이 그늘이 참 좋아요

굴참나무 속에 섞인 한 그루 자작나무처럼

알몸으로 앉아 있어요, 강가에서 뒷물을 마친 친구가

건너편 남자의 짝이 되기 위해 돌아오고 있네요

방부제가 섞인 이 식빵과

농약이 스며 색깔 고운 과일들, 주기도문과 함께

벌거벗은 내 몸을 함께 들어보셔요

죽어도 우리들은 썩지 않을 거예요

썩지 않는 우리들의 사랑 먹고 마시어요

이 신선한 공기는 십 년만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런데, 우리들의 풍경 밖에서

우리를 엿보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내 허벅지 사이로 기어 들어와

배꼽 아래까지 깊숙이 치밀어 올리는 뜨거운 시선

도대체 도대체 보이지 않는 당신은 누구지요?

                                                                  —〈미네르바〉2009년 여름호

 

 

신들의 놀이터 / 강인한

 

 

태초에 말씀이 있어도 좋고

장엄한 노을 아래 배경음악을 까는 것도 좋겠지

삼면을 장벽으로 세우고

한 쪽은 바다가 좋아 평화로운 바다 지중해

 

대낮의 길거리 아무데도 도망칠 곳이 없는 거리에

아이들이 달리면서 손을 흔들어

날아오는 비행기를 향해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하마스의 로켓탄을 던져봐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화우라늄폭탄도 몇 개

백린탄은 반짝반짝 폭죽처럼 아름답지

밤의 커튼 아래로는 신성한 달빛을 좀 흘려줄까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

철근이 꽃대처럼 목을 뽑아 내다보는 거기

어린 사내아이의 연한 뱃가죽에서

삐져나온 창자를 물고 가는 개

포도알처럼 달콤한 소녀의 눈을 파먹는 쥐들

 

끔찍하게 즐거워서 으스스 소름이 돋는 놀이터

이 풍성한 성찬에 당신들을 초대하고 싶어

유서 깊은 원한을 그윽한 향불로 피우며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봐, 붉은 피와 흰 뼈가 검게 타고

증오가 다윗의 별로 빛나는 그곳.

                                                                   —<현대시학> 2009년 3월호

 

 

 

환절, 존재 변환의 사이 / 이훈

 

 

   강인한의 「토파즈빌 통신」은 얼핏 보면 생의 희로애락에서 초탈한 시선으로 읽힌다. 눈이 내리고 비가 오고, 살아가는 풍경이 시선 바깥에 전시된다. 뒤로 물러선 자 특유의 관조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 녹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시의 중간에는 이런 시선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오고 가는 것이 무상하고 유수와 같았다”라는 깨달음을 제시한다. 한때의 사랑, 격정적 감정들, 이제 영원히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사건은 관찰자의 눈 아래에서 안정적인 거리감을 취한 채 기억의 디렉터리에 저장될 듯싶다.

   게다가 시는 전체적으로 보는 행위가 매듭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흔들리고 유동하는 대상은 ‘보았고’, ‘알았다’, ‘내려다보는’, ‘보일 때’, ‘보기도’, ‘보였고’, ‘안아보다가’, ‘보였다’ 등의 고정 닻으로 인해 일관된 표면으로 응집한다. 바라보는 행위는 부유하는 삶의 기미와 흔적을 통일된 맥락으로 묶으려 한다. 바라봄은 주변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의 풍경으로 일차원화 한다.

 

   그러나 시는 탈구하는 미세한 흔적을 곳곳에 내장하여 표면을 ‘덜컹거리’게 하고 이내 의미 전체를 변경한다. 현실에서 안전하게 물러선 자의 득의연람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해야 가능하다. 화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지만 이미 스스로 현실에 개입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체는 주위를 배회하는 행위 뒤에서 스스로를 지운다. 전경화된 미장센은 시각 중심적 존재를 만들어내는 필수 불가결한 장치인 셈이다.

   그러니 화석화 된 풍경 뒤의 존재는 피와 살이 아닌 추상화된 관념의 더께에 둘러싸여 있다. 가령 “색맹검사표 같은 어지러운 눈발 속/ 모든 새의 이륙과 착륙이 금지된 것”과 “무상하고 유수와 같았다”는 걸 느낀다. 세계가 ‘색맹검사표’ 따위로 다가온다는 건 어떤 걸 못 본다는 불안감이자, 맹목과 탈락에 의해서만 겨우 본다는 걸 알려주는 토로이다.

 

   물론 무엇을 보든 ‘나’는 분명 한쪽밖에 보지 못한다. 동시에 대상의 다른 면을 같이 볼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자신이 그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대부분의 경우 감각적 확실성은 보편적인 차원으로 쉽사리 승인되곤 한다. 봐야 믿는 확실성의 덫은 ‘색맹’과도 같이 다른 가능성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는다. 이 지점은 주체가 탄생하는 틈이기도 하다.

   똑바로 바라볼 때는 아무것도 없지만 어긋남과 오독, 오해를 중심으로 주체는 공전하며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 세계는 그저 “어지러운 눈발”로 흩어지며 모든 건 “된 것을 알았다”에서처럼 추상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존재의 어지러움은 현실의 장면으로 대체되고 앎은, 순간 생성된다. 그러나 이는 오직 지식의 영역이지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무상과 유수의 자연사적 율동은 구체적 삶의 치열한 끈적거림을 탈취시켜내는 장치인 셈이다.

 

   시의 함의는 이런 표면적 흐름 밑에 도사린다. 화자의 소망과는 달리 “풍경이 덜컹거린다”, 존재가 흔들린다. 이를테면 풍경은 건물과 건물 “사이 옹색한 얼굴로” 등장한다.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사계”가 암시하는 것처럼 화자는 눈뜬장님과도 같은 맹목에서 바라본다.

   직사각형의 직선이 자른 것 안에서만 사계는 흐른다. 시는 ‘사이’의 진폭을 그대로 그려낸다. 어떤 게 채 되지 못하고 초과하는 번짐과 흐름 말이다. 시선과 그것이 감춘 것 사이에서 시는 진동한다.

 

   「토파즈빌 통신」은 기대를 배반하는 ‘사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엄숙함은 생활적 ‘찌꺼기’들로 인해 교란된다. 벚꽃에 묻어나는 도가연한 포즈는 “발부리에 채인 강아지”와, “황사와 함께 돼지독감”을 걱정하는 모습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유유히 외출하는 여자”와 대비된다. 말하자면 “잔뜩 근엄한/ 최고통치자의 지당한 유시가 웬일로 코미디 대본으로/ 착각되는 때가 많은 환절기”이다.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한껏 엄숙한 근엄함과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처하게 되는 상황의 중첩, 믿는 상식의 틀과 이를 벗어난 개인적 진실 ‘사이’에서 삶은 빚어진다. 114동 115동 사이에서의 풍경은 생이 만들어내는 진폭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사이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할 때 상황은 보다 심각해진다. 가령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현대사회의 경험에 주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시는 “여러분의 자랑스런 후일담이 되어드리”겠다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스스로의 믿음을 위해 필요한 알리바이가 충분히 되어드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경험은 그것이 다시 반복될 때 현재를 굳건히 만들어내는 지점으로 호출된다. 그들은 “토요일까지 죄를 짓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사함을” 받고 “아침 이슬처럼 깨끗해”진다.

   중요한 점은 오늘날의 체험이 잘 관리되는 슈퍼마켓처럼 분할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르듯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생활의 법칙, 생존의 법칙을 따라 일상을 채택하고 주일에는 다시 ‘영적’ 필요성으로 회개하고 깨끗해진다. 진정성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차원으로 축소된다.

 

   “주기도문과 함께/ 벌거벗은 내 몸을 함께 들어”보라는 권유는 경험의 분할로 두 가지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불쌍한 아이들을 보고 기꺼이 ARS자선행위를 한다. ‘깔끔하게’ 전화버튼 몇 개만 누르면 타인을 향한 동정심은 손쉽게 처리된다. 현재의 안락한 생활에 대한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고 말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순간 동시에 그는 ‘끔찍한’ 이웃 사이에서 적개심에 가득 찬 일상적 존재로 바뀐다. 두 개의 경험적 질이 던지는 심적 감응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가볍게 모드 전환하는 법에 우린 익숙하다.

 

   화자는 “물려받을 주식에 대한 생각”과 함께 “썩지 않는 우리들의 사랑”을 먹고 마신다. 썩지 않는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가볍게 포장을 뜯듯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진열된 상품이다. 숱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되는 최음제—사랑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음이 가끔 적적해지면 상비약처럼 복용한다. 본질적인 면은 마비되고 곧 중독된다. 어쩌면 ‘진짜’ 사랑보다 더 진짜 같은 드라마 사랑에 충분히 내화된다.

   그러나 두 개의 연으로 나뉜 이유에서 보이듯 첫 번째 의미는 두 번째 연의 담화로 불안에 휩싸인다. “풍경 밖에서/ 우리를 엿보는 당신은 누구인가요”라는 바깥의 시선으로 인해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전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깊숙이 치밀어 올리는 뜨거운 시선”은 망각한 타자의 시선일 터이다.

 

   허위의식과 실체와의 대비는 「신들의 놀이터」에서도 비슷하게 변주된다. 시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상화한 살육의 현장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살육이 행해지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처참히 죽어간다. 그러니 묻고 싶을 게다. 도대체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해주었냐고.

   “끔찍하게 즐거워서 으스스 소름이 돋는 놀이터”에 시인은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시인은 여기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안온한 현실이 과연 그리 정당한지를 발본적으로 묻고 있다. 시인의 초대는 윤리적 응답을 요구하는 초대이자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책임질 건지를 묻고 있는 준엄한 물음이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데 익숙한 거리감은 자신을 속이는 환상의 틀일 따름이다. 그저 “풍경을 갈아”(「토파즈빌 통신」)끼우는 데서 멈추어선 안 된다. ‘환절기’는 존재가 바뀌는 변환의 계절이어야 한다. (*)

 

 

이훈 / 문학평론가. 200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현재 경희대 객원교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9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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