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시와시학 신춘문예 당선작
정읍을 지나며
/ 조승래
정읍 벌판에 내리는 눈은
세상을 우물 같은 침묵으로 만들고
그 무게에 마을은
두레박처럼 깊이 가라앉았다
눈과 바람의 아득함 너머로
나뭇가지는 무슨 형상으로 흔들리고
무덤 속에는 아직 꿈틀거리는 그 해 죽음이 있었다
눈에 길이 막힌 봉분들은 몇 번인가 오래오래 울었다
내일이면 세상은 다시 태어나리라
정읍의 어린 누이들도 새 단장을 마치고
이불 속 봄을 이야기하리라
눈 속을 날아가는 한 무리 새 떼가
활처럼 휘어졌다 다시 펴진다
내 생의 워낭소리
/ 조승래
처음부터 나는 워낭 하나 달고 길들여졌다 다른 워낭은 절대 달지 않고 한 워낭만 고집하며 내 존재를 댕강댕강 입력해 왔다 워낭은 내 주민등록증이다 도살장에 갈 때까지 나는 죽자고 한 워낭을 달고 소리를 조율하는 것이다 워 워어! 서야 할 자리에서 나는 서야 하고 이랴! 가야 할 때 나는 가뿐하게 가지만 내 생의 일기는 절대 긍정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외양간에서거나 작업장에서거나 나는 늘 내 임금만큼 꾸벅거리며 소리로 내 뜻을 알리지만 단 하나 그 소리는 저울의 눈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언제인가 장꾼도 다 떠나간 쓸쓸한 내 생의 우시장 한 모퉁이
누가 나를 대신하여 피 묻은 워낭 소리 하나 수습하리라
수렵사회의 귀가
/ 조승래
어두움이 거머리처럼
대낮의 기억을 빨아댄다
끝없는 터널 저 멀리
거리에서 오래된 활자로 뉴스가 팔리고 있다
지난 여름 모든 구호들은 시들해졌다
꽁초 끝
보랏빛 소멸을
문득 바라본다
제 그림자를 밟으며
사라진 과녁 속으로
쓸쓸히 귀하는 원시인
오늘도 멀리
막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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