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신 인 문 학 상

제24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_ 이빈섬, 김광도

by 솔 체 2015. 4. 16.

 

제24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_ 이빈섬, 김광도

 

 

시경(詩境) 외3편

 

    이빈섬

 

 

 

   추사가 가문의 원찰(原刹)인 화암사 뒤뜰 바위에 육방옹의 글씨 ‘시경(詩境)’을 새기던 그날 종일 눈이 내렸다. 서각(書刻)쟁이는 얼어 곱은 손으로 내려앉는 눈과 깨진 돌 부스러기를 연방 함께 털었다. 추사의 가차없는 눈금에 한치 어긋날까, ‘시(詩)’ 한 글자의 속을 들여다보며 하루 내내 조심스레 똑각똑각거렸다. 한 점 온기 없는 세한의 골방, 추사는 젊은 혼신을 다해 시의 경계(境界)에 저 홀로 말뚝을 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화암사 내부에 걷잡을 수 없는 자기를 가두며 수천 톤의 폭설을 세상과의 사이에 쏟아 붓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20년이었다. 절뚝이며 넘어오던 길이 털썩 주저앉는 산자락, 오래 전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담벼락 다 무너진 집, 귀양의 바닷바람에 바랜 대머리 노인을 못 알아본 화암사 모자라는 불목하니가 말한다. “집은 어디서 왔소” 너는, 내게서, 집이 보이느냐. 천축고선생(天竺古 先生)이 등에 진 낡은 책짐 배낭을 내려놓으며 털썩 앉는 툇마루 앞에, 눈발들 처마에 내건 주렴(珠簾)인 양 쌔륵쌔륵 내려앉는다. 스무 해 궁리 끝에 툭 터져오른 부작(不作)의 난초 한 줄기, 갇힌 여백들 드디어 향기롭다.

 

   시(詩)를 찾아 떠난 마음이 언어의 절집에 돌아와 눕는 방에, 타득타득 타들어오는 군불 같은 생각들, 다 떠나고 남은 빈 집에 켜켜이 먼지향기가 쌓였다. 굳은 궤짝에서 추사가 오래 전 돌아간 아내의 잔서(殘書)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치마조각에 따듬따듬 씌어진 글씨가 조심스럽던 생애의 까치걸음처럼 지나간다. 소리 날까 겁내는 소리들이 바르르 떠는 비단, 꾹꾹 누른 그리움 얼마나 많았겠느냐,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솎아낸 네 글자, 장, 무, 상, 망(長毋相忘), 시(詩)는 먼지 위에 뚝뚝 떨ㅇ어지는 물방울이 번지는, 흐린 네 글자 부근에 있다. 평담(平澹)의 얼굴로 무심코 바라보며 곁에서 괜히 우는 불목하니의 갈빛 눈 속에 있다.

 

 

 

구룡포에서

 

 

 

敵産가옥 앞에서

문화해설사는 말을 골랐다, 마음이 시키는 말과

말이 시키는 마음이 낡은 미닫이에 삐익 소리를 내는 동안

늦여름 햇살이 늙은 개처럼

가파른 계단을 핥았다

백년 전 다랑어를 따라온 어부의 길에는

배고픈 사람 특유의 착한 표정이 있을 뿐

우리 바다를 훔치러 온 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無主空海에 닻을 내려

방파제를 쌓는 동안 추억인들 왜 쌓이지 않았겠는가

이발소 건너 백화점 지나 떠들썩한 요정을 지나

집집마다 전화가 있던 풍어의 시절에는

들끓는 욕심에 멱살인들 가끔 왜 잡지 않았겠는가

떠나는 날에 정들어 삐걱이는 이 집들을

채 팔지 못했다 다만 얼마 후에 다시 오마 맡겨두고 떠났을 뿐

육십여 년 제 것 돌아보는 마음으로 먼 구룡포를 바라보았다

나라는 바뀌고 시절은 흩어졌어도

그 부귀와 때 묻은 삶의 냄새를 잊지 못했다

지금 다시 관광객이 궁한 도시가

옛날 주민들을 향해 묘한 손짓을 보내는 시절

주저앉아 허물어지는 마지막 집

육신은 번짓수도 가물거린다

적의 재산 위에 임시 戶籍 하나 덮어

버틴 구룡포 바다는 시치미 떼듯

다랑이들이 가뭇없다

 

 

 

밧줄

 

 

 

너는 불가사의하다.

너는 내부가 없다.

밧과 줄, 그 사이를 아무리 수색해 봐도

헤아리고 풀어낼 수 있는 끄나풀이 없다.

세 갈래 삼줄이 서로 꼬아지며

억세게 단단해진 근육질의 영혼.

밧줄, 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목구멍에서 힘줄이 일어난다.

벼랑 곁에 두 손이 그 한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온몸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밧줄, 밧줄 소리내면

온몸이 꽁꽁 묶이는 것같이

너는 서스펜스다.

계삭(繫索)이란 너의 다른 이름, 로프란 너의 다른 이름.

너는 아무래도 이른 아침 옷을 벗어제친

젊은 사내임이 틀림없다.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의 하늘로

배를 미는 힘,

밀수록 팽팽해지는 생의

자유와 구속, 그 길항을 중재하는

오른손과 왼손임에 틀림없다.

밧줄 너에겐,

풀어놓기에는 위험한 죄를 옭아맨

준열한 기강이 있고,

어느 날 벼락 치는 하늘에서

스르륵 내려온 한 줄기 구원이 있다.

하지만 팥쥐를 속인 썩은 동아줄은

밧줄이 아니다. 밧줄은 내면과 외부가

다르지 않기에 썩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밧줄은 절망한 자에겐

천장에 드리운 둥근 올가미이기도 하지만

그 밧줄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는

재기의 전율이기도 하다.

밧줄에는 노가다의 땀이 있고

뱃사람의 소금냄새가 있다.

밧줄에는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

그 연대(連帶)의 비장한 신뢰가 있다.

밧줄 하나면

저승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조개구이

 

 

 

복더위날 청량리 오팔팔 거리에서

땀을 비같이 흘리며 두 여자 조개를 굽는다.

젊은 여자 목장갑을 끼고

쩌억 벌린 조개껍질 속에 든

붉은 속을 집게로 가르고 가위로 자른다.

어떤 것은 워낙 이를 악물었는지

터지면서 파편이 튀기도 하고

어떤 것은 벌써 세상 버린 뒤라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년 성질 드럽네, 늙은 여자가 킬킬거린다.

하지만 대개는 일정한 열을 받으면

담담하게 내부를 내준다. 살을 발리고

근육을 뜯기면서도 죽음은 과묵하다.

괄약근들은 천국에 가는 건감? 꼬득꼬득해진

조갯살 하나를 나무젓가락으로 들어올리며

젊은 여자는 말했다. 천국이 어디 있냐? 이년아.

그게 있었다면 여기부터 있지, 왜 딴 데가 있겠냐?

늙은 여자는 빈 제 잔에 소주를 부으며 말했다.

하기사, 괄약근에겐 초장이 천국이지.

얼마나 맛있어? 초장 맛도 못 보는 년이 바보지.

흐이그, 초장 떨어지는 거 잠시잠깐이다 년아.

그래서 언닌 초장만 먹는 거야, 조개 안 먹고?

동족상잔이 싫어서 그런다, 왜?

처음처럼 한 병이 어디론가 흘러갔다.

젊은 여자는 다시 집게를 들었다.

잠시 침묵하는 두 여자 사이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씻지 않은 하체가 쓰리다.

옴죽옴죽 쫄깃쫄깃 쫀득쫀득

야한 의태어가 소금기에 취하여

붉은 복도를 헤엄친다. 땀을 닦는 젊은 여자,

죽은 조개 하나 집게로 건져

스텐리스통 그릇에 툭 던진다.

 

 

---------------

이빈섬(본명 이상국) : 1962년 경주 출생. 《월간중앙》전문기자, 편집디자인 실장 겸 한국홍보연구소 미디어회사 부사장. 저서 『옛 공부의 즐거움』『추사에 미치다』『눈물이 빗물처럼』등.

 

 

 

 

봄의 친필 외3편

 

    김광도

 

 

 

살포시 눈을 뜬다

꽃의 얼굴이 동그랗다

기다렸다는 듯

나무 새순의 입술

첫 문장을 풀어 놓는다

행과 행 사이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퇴고되지 않은 착한 생각들이

연과 연을 이어간다

자유로이, 바람이 문장 부호를 찍는다

땅 밑 즐거운 뿌리에서

지상의 우듬지까지 펄럭이는

사랑의 편지

꽃샘 잎샘을 이긴

이목구비 또렷한

봄의 친필

 

 

그녀의 반전

 

 

그녀는 지도에 없다

 

뫼비우스 띠처럼

길 위로

또 길이 걸어가고 있다

 

사막에서 길은 시작된다

길은 사막에서 지워진다

 

꿈꾸는 것은

시계바늘처럼

스스로의 무게 추에 흔들리고 있다

 

오아시스는 어디에도 없다

도시의 사막 뒤로

비상구는 열려 있었다

 

길이 지워지고 있다

지워지는 길을 따라

만삭의 그녀가 맨 얼굴로 돌아서고 있다

 

 

산소마스크를 쓰다

 

 

세상 저 편의 문이 열릴 때

나의 문은 닫힌다

나의 별에 어둠이 내린다

빙하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나를 태운 작은 별이

회전 열차처럼 빙빙 돌아간다

어딘가를 향한

낯설지 않은 그 통로에서 멀미가 난다

숨을 몰아쉰다

신의 계시가

터질 듯 조여드는 심장에

붉은 바코드를 찍는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내 귀 속의 바다에서 파도소리 고요해 진다

푸른 명줄 곁에 잠시

나의 바다도 눕는다

 

 

제로섬 게임

 

 

소를 키우는 K씨가 사라졌다

어젯밤 이웃 목장으로 가는 문 폐쇄되고

고개 숙인 풀에서 피 냄새가 난다

민들레, 애기똥풀, 돌미나리, 산버들

쇠무릎은 이미 소식이 없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소리 없는 총을 쏜다

총구 하나가 세계를 흔들고

움직이지 마라! 저항하면 사살이다!

월스트리트가 뒷골목을 흐르던 쇳물

이곳까지 누렇게 번지고 있다

도시의 거리는 날마다 떨이에 땡처리

세일에 세일을 거듭하는 은행

전자 칩이 꽂힌 내 머리 속의 잔고는

이미 마이너스다

종교가 쇠사슬에 묶인 포로처럼 흔들리고

더 이상 푸른 유토피아는 없다

 

 

-----------------

김광도 : 1961년 경남 양산 출생. 양산대학 졸업. 현재 농원에서 약초재배를 하며 방통대 국문과 재학 중.

 

==================================================================================================

 

[ 신인작품상 심사기 ]

 

개성 있고 단단한 작품들

 

 

 

   당선권에 든 열 분 정도의 작품들에서 우리 심사위원 일동은 다음 두 분의 작품을 신인상 당선자로 이의 없이 밀기로 하였다.

 

   이빈섬 氏의 「시경(詩境)」外의 작품에서는 "언어의 절집에 돌아와 눕는 방에, 타득타득 타들어오는 군불같은 생각들"이 소담스레 모아져 있다. 모가 나지 않은 듯하면서도 모가 있고, 음전한 것 같으면서도 듬성듬성 박은 말뚝 같은 다부짐이 있다. "먼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번지는" 낡은 서책 위의 오래된 글자 냄새가 날 듯한 「시경(詩境)」, 내면과 외부가 다르지 않기에 "썩을 수 없"는 그 연대(聯帶)의 비장한 신뢰를 얘기하고 있는 「밧줄」, 조개 굽는 두 여자의 거친 대화를 통하여 생의 골격과 내면을 응시하는 「조개구이 」등 응모된 작품 전편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김광도 氏의 「봄의 친필」外의 작품 등은 간결하면서도 사물의 요체를 짚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꽃샘 잎샘을 이긴/이목구비 또렷한"「봄의 친필」에서는 다가오는 봄의 모습을 " 첫 문장" "행과 행 사이" "퇴고되지 않은 착한 생각들" "연과 연" "바람(이) 문장 부호"으로 연결되는 확장은유가 감각적이다. 「산소마스크를 쓰다 」, 「제로섬 게임」 등에는 시대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눈이 날카롭다. 서정과 시대적 인시기 같이 하기 어려운데 이를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장점이다.

 

   두 분 다 오랫동안 언어를 갈무리해온 내공을 지니고 있어 듬직하다. 우리 시단에 좋은 식구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두 분의 작품만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른 분들의 작품이 뒤쳐져서가 아니라 이 두 분의 작품의 개성이 살아있고 보다 출중해서이다. 응모작이 각각 한 분인 수필과 평론상은 다음 기회를 다시 한 번 보기로 하였다. 차기 응모작품과 같이 심사할 예정이니 작품은 다시 보내지 않아도 된다.

  

  심사위원 : 이상국, 정일근, 이지엽(글)

 

                                                                                                                            

                                                                                                                            —《열린시학》2010년 가을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