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신인추천작품상_ 이난희, 김대성
심사위원_ 원구식, 박주택, 이재훈
얼음 호수 외2편
이난희
마지막으로 후투티 한 마리가 바닥을 치고 날아간 다음, 호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종적을 감춘 물을 바라보며 나무 한그루, 제 가지를 흔들며 뒤척였다
햇빛은 기척도 없이 걸어 다녔다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 날아와 떨어지자 흔적도 없이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끔씩 지나가던 바람이 문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문은 더 팽팽하게 닫힐 뿐이다
대문 앞을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처럼 한 차례 비가 쏟아졌다
우듬지에서 잔가지 하나 가벼이 떨어져 갸웃, 문틈을 내다
단단히 영근 물집 하나를 기어이 톡, 터트리고야 만다 순간
시퍼렇게 멍든 수십만 개의 물방울들이 반짝이며 튀어올랐다
나무는 발가락을 꿈틀거리며 거울 속 발그레 물든 얼굴을 내려다본다
우리 동네 아저씨
빈집이 많은 우리 동네, 와본 적이 있나요 대낮에도 밤이 꽉 들어차 있어 히죽거리며 쥐들은 돌아다니죠 떠난 이웃들이 버린 가재도구가 제멋대로 골목을 지키고 있어요 파자마를 입은 채 하품을 하며 골목을 서성이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기도 해요
즐겨 쓰는 향수 때문에 안나수이라고 불리는 여자의 창문을 열었다는 둥, 하얀 편지봉투처럼 은밀하게 '좋은느낌' 생리대를 창가에 걸어두고 달아났다는 둥, 제멋대로 옥탑방에 올라 빨랫줄에 널린 계집애 팬티에 오줌을 갈겼다는 둥, 아무도 본 적 없는 남자의 행적이 온 동네에 파다했지만 세상은 모르는 척, 귀머거리였어요 그런
우리 동네에 아저씨가 살아요 그날은 엄마를 기다리다 잠든 밤이었어요 베고픔을 참으며 기다림에 지쳐갈 때 잠은 최고의 보약이지요 꼬마야 꼬마야 내가 졸아줄게, 그날 밤 꿀잠 든 먼지들을 깨우며 다락방에서 아저씨가 내려 왔어요 내 이이 청테이프로 봉해지고 칭칭칭, 내 목이 조여와 허공에 손을 휘저었지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요
출렁, 파란 물통 속에 잠긴 내 몸이 흔들려요 기포처럼 가벼워진 내 몸이 둥둥 떠올라요 저게 뭐죠? 아, 눈알이에요 미친개의 눈빛처럼 번들거리던 아저씨의 눈알, 흐흐흐 나를 밀어내던 문을 찾고 싶었을 뿐이야 세상에 나를 내보낸 문門, 꼭 잠긴 문을 찾아 거리를 쏘다녔어 곧, 우리들이 엄마에게로 돌아 갈 거야, 아저씨가 말하는 순간 아저씨의 두 눈알을 파내고 싶었는데 어쩌죠, 두 손이 꽁꽁 묶여 있어서 떠듬떠듬 빈집에 들어가 문 두드리는 우리 동네 아저씨, 아무도 살지 않는 집만 찾아다니며 그도 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나는 깨어나지 않을래요
수상한 거리
저물 무렵 호박이 넝쿨째 굴러다녀요 불 밝힌 호박등이 소형자동차 등딱지에 실려 굼벵이처럼 느리게 굴러다니죠 건장한 사내들은 '호박관광나이트' 깃발을 들고 무슨 용맹한 무사라도 되는 양 행진을 하죠 신이 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며 얘야, 할로윈 축제는 아직 멀었구나 점잖게 타이르며 서둘러 집으로 돌려보내죠 시무룩한 얼굴로 아이들이 돌아가면 누군가 모르는 척 호박 한 덩이 슬며시 끌어안고 돌아서요 그런 집에서는 서둘러 저녁상이 차려지고 다정한 자장가가 재촉하듯 들려오죠
아이들이 잠든 사이 호박마차를 탄 엄마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를 든 아빠가 관광을 떠나고 있어요 강호동, 황진이, 오징어, 땅콩…명찰을 단 웨이터들이 손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호려한 상이 차려지고 알 수 없는 눈빛들이 오가는 사이 엄마는 아빠를, 아빠는 엄마를 잃어버리기도 해요 자정이 넘어도 마법은 풀릴 줄을 몰라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새 나라의 엄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와요 신문을 든 새 나라의 아빠가 헛기침을 하며 들어오는 새벽, 시들고 일그러진 호박 하나가 시치미를 떼고 집안을 굴러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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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희 : 충북 충주 출생. 주소: 인천시 부평구 갈산2동. 2010년 9-10월호《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뜨개질 외 2편
—백석의 운을 빌어
김대성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시기 때문에
세상에는 눈이 내린다
어머니는 27억 광년을 가야 할 거리에 계시다
그러나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시기에
늘 거실 한쪽 연탄난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신다
한쪽에 초라한 내가 있다
어머니 뒤에는 언제나 새하얀 아침이 있다
눈을 들어 어머니의 손을 보니 손이 차시다
그 찬 손이 쓱 스스슥 움직이며 바늘이 엇갈리니
한 코 또 한 코 세상이 엮어진다
하얗게 타들어가는 연탄처럼
난로 위에 주전자도 숨이 차다
어머니는 밤새도록 쉼 없는 손놀림으로
밤을 밀어내고 계신다
저건 분명히 내 옷일 것이다
하며, 잠이 들었는데
이른 아침 눈을 떠보니 식은 난로 옆에
어머니가 안 계시다
커튼을 젖히고 밖을 보는 순간
온 세상이 하얀 털실로 덮여 있다
나뭇가지 위에도
벽돌 담 철핀 위에도
어머니가 밤새 서걱이며 짜 놓으신
소복한 세상
눈 오는 밤은 이승과 저승의 교집합
나는 어느새 27억 광년을 달려온 것이다
감자탕
어머니가 감자탕을 끓이시고
나는 그 속에서 아령을 든다
하나
둘
세상이 들린다
바다도, 산도
알통의 힘으로 번쩍 들었다
네 마음도 들었고 우리 집도 들었다
아령을 놓았다
하늘이 내려왔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바다가, 산이
내 이두박근 속으로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
세상이, 우주가
아령 같은 작은 무게로
내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이다.
감자탕이 끓는다
감자탕 속에서
혼이 빠져나간 뼈들이
깻잎에 싸여 끓고 있다
어머니가 갖은 양념을 넣으신다
나는 그동안 들었던 돼지 등뼈를 내려놓고
국물 속에 얼굴을 박는다
정화수처럼 맑은 물이 여기에 있다
냄비 속에 담긴 세상은
개나 걸이 아니면 모나 윷이다
웃는 소리 들린다
점점 더 크게
까르르 끼랑
메아리는 산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온 천지가 미쳤다
푸르르 푸릉
벌, 나비처럼 웃는데
아주 매운 고추를 한 입 깨문 순간
번쩍!
불꽃이 튀는 냄비 속에서
내가 사정없이 끓고 있다
그 옆에 돼지머리가
눈을 감고 웃고 있다
삶에 찌든 때가 묻은 지폐를
앙다문 입에 물리고
절을 한다
콧구멍에도 말아 끼우고
귓구멍에도 쑤셔 넣는다
큰절을 한다
잘린 두상은 구멍마다
박혀 있다
긴 항해를 마치고
항구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 선 사랑을 치르듯
감자탕이 끓고 있다
어머니가 감자탕보다 환하게 웃고 계시다
그 앞에 벌게진 내 얼굴
세상은 소주잔보다 약간 더 기울어져 있다
껌
언제부턴가 씹던 껌을
수도 없이 다시 씹어서 벽에 붙여 놓으면
어느 날 영롱한 사리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가난은
껌 하나의 목숨도
참으로 질기게 하였다
언젠가 벽에서 떼어낸 껌을
새처럼 짹짹 씹었다
그러자 어디에도 없는 저승과 이승의 꼭짓점 사이에서
하기 싫은 거
가기 싫은 거
잊기 싫어도 잊어야 하는 거
내 것이 아니기에
아프게 놓여야 하는 거
수만 번의 번뇌와 아주 짧은 기쁨 같은 것들이
단감나무 주인 바뀌듯 바뀐다
낮엔 돈 떼먹고 감옥 간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밤엔 껌처럼 벽에 붙어서 잔다
산 넘어갔다 돌아온 새야,
어젯밤 꿈 얘기를 들려줄까?
씹던 껌을 다시 벽에 붙여 놓고 보니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스위치 같다
어느 해 떠들썩하게 입적한
큰 스님의 사리와 같다
아니 옆으로 볼록 올라온 밥알,
마치 산소의 묘봉 같다
꾹꾹 눌러 한 톨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담아 올린 할머니의 사랑이
지금도 저렇게 묘봉 속에서 밥을 짓고 계시다
나는 견뎌낼 것이다 이를 악물고
속에서든 밖에서든 씹고 또 씹히는
껌은 어느 날 영롱한 사리가 될 것이다
씹어도
씹어도
씹히지 않아
아귀에 남은 미련처럼
오늘도 벽에 붙여두는
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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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 1957년 부산 출생. 서울에서 성장.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주소 : 서울시 성북구 정릉2동. 2010년 9-10월호《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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