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신 인 문 학 상

2010년 계간 <시평> 신인상 당선작 -박현주. 이병곡. 조재형

by 솔 체 2015. 4. 25.

식물 채집하는 여자

 

박현주

 

 

불씨를 들고 빙하를 건너는 사람의 이야기 들려주었지

 

납작 눌린 가슴이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어

잎맥만 도드라진 풀의 목소리

부딪히면 잠자리 마른 날개 소리를 내며

등과 배가 붙은 몸을 일으켜 세웠어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목마름의 길고 짧은 궤적이 귀를 막았어

 

물 한 모금 넘기지 않던 목울대

목마름의 한쪽을 떼어낸

양 볼이 부은 입 속

눈을 깜빡거리고 귀를 움찔거려

 

얼음이 박힌 그녀의 발바닥

불씨는 제 발등 위를 계속 걷다 빙하 위에 떨어지고

내게 지독한 은유를 남겼어

마스크를 쓰고 웃는 웃음소리만큼 절묘했지

 

앨바트 복숭아의 즙을 받을 때만 잠깐 발그레해지던 입술

그녀의 마지막 말은 무언가를 꽉 문 검은 입이었지만

결국 복숭아 색깔이었어

 

그녀가 남긴 녹빛 채집록을 펼치자

유리나방이 날개를 찟었어

 

빙하를 건너고 있어

손가락 불꽃이 타오르고

순록의 털이 긴 발굽은 앞으로 걸어가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거기

미기록종으로 만나길

 

그땐 턱뼈가 좀 더 단단한 얼굴로 만나

허벅지가 굵은 영혼이면 좋겠어

 

 

 

달 김장하기

 

이병곡

 

 

그믐밤에 달 씨앗을 심었습니다

한 뼘 밭에 꼭 한 알 심었더니

벌써 알이 차오릅니다

개가 짖습니다

보나마나 새벽잠 없는 엄마가 물을 주고 있지요

간밤에 서리가 왔습니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달을 건집니다

정말, 내 그녀처럼 한아름 가슴에 안겨옵니다

조심스레 옷을 벗겨야죠

기러기가 뜯어먹다 만 전잎은 짚으로 엮어

처마 밑 메주 옆에 매달았죠

서로 맛간을 봐야 하거든요

아폴로가 앉은 자리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소금으로 정성스레 닦으니

푸릇푸릇 그녀의 속살이 보입니다

어서 절이고 양념을 만들어야지

구름과 바람을 넣고 빠알간 햇살을 섞어 버무려 보니

태양초보다 목젖이 더 훈훈합니다

계수나무 열매가 산초보다 더 가슴이 싸-한 줄 처음알았지요

물론 장독에 담가야지요

달도 호흡해야 하잖아요

나는 목욕만 시키고 엄마가 치댑니다

그녀가 부끄러워 가슴이 씰룩쌜룩하지만

곧 내 아내로 숙성될 거에요

엄마 손때도 더하여 맛깔납니다

양로원 동서도 있고 애육원 손주녀석도 생각나겠지요

다 담고 나니 어둑한 하늘에 초승달 하나 또

떠오릅니다

 

 

 

모스크비나 빙하에서

 

조재형

 

 

텐트도 침낭커버도 없다 날은 어두어지고

체트록봉과 모스크비나 빙하 사이에서 비박을 한다

검푸른 하늘의 별빛이 구름에 덮히고 눈발이 날린다

침낭 위에 내린 눈은 체온에 스며들고

밤이 깊어질수록 침낭과 등산복까지 얼어붙었다

저체온증이 오는것 같다

이대로 잠들면 안된다

밤새 뜬 눈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가물가물한 의식을 붙잡고 빙하를 바라본다

어둠속에 빙탑이 솟아 있고 빙탑이 무너지고

눈보라 거세지며

등 뒤에선 돌 구르는 소리 요란하다

 

체력도 정신도 바닥이 났을 때

나를 버티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엘비라*의

"제발 용서해주세요"

"사랑합니다 여러분"

"안녕..." 이란 마지막 말이

떠오르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움직여야지, 빙하를 건너야지

세락원 윈시의 숲처럼 솟아 있고

눈보라에 앞이 보이지 않아 길을 잃는다

아이스폴에 막혀 되돌아오고

칼 끝 같은 빙탑에 올라 길 찾기를 수십 번

이제 길을 찾기 보다는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한다

끝도 없는 검은 아이스폴에 한쪽 발이 미끄러지고

아슬아슬 피켓을 찍어 일어서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엘비라의 말만 되뇌이면서

돌아온 베이스켐프엔

없던 새가 오고 있었다

후투티가 오고

참새 같은 콩새 같은 새가 오고

하얀 눈 속에서

요정 같은 에델바이스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속삭는 듯 피고 있었다

 

 

*1974년 구 소련에서 아프카니스탄과 티베트 국경 흰두쿠시 북쪽에 위치한 사마나봉(7498)과 레닌봉(7134)에서 국제 캠프가 열렸다 초등및 루트개척의 꿈을 안고 세계 등반대가 모여들었다 여덟 명의 구 소련 여성 등반대는 레닌봉 정상에서 막영을 하다 지진으로 인한 태풍울 맞고 하산 중에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구 소련 팀의 등반대장은 엘비라 샤트에바.

 

 

-2010년 <시평> 겨울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