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 바치는 백합의 향기-이향아의 작품해설 / 강인한
이향아 시집 <당신의 피리를 삼으소서> 해설
이향아 시인의 『당신의 피리를 삼으소서』는 시인의 두 번째 신앙 시집이라고 한다. 시인이 쓴 머리말을 읽으면서 나는 '그래 맞아, 이향아 시인은 독실한 크리스찬이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깨치게 되었다.
시인과의 만남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래 전 전주에서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이 된다. 고교 시절인지 대학 시절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때 이향아 시인은 경희대학교에 재학 중인 문학도가 아니었던가 싶다. 전주의 어느 다방에서 조촐한 <문학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소설가 안수길 선생님이 내려오셨고, 숭실대의 김현승 시인께서도 자리를 함께 하신 자리였다고 기억된다. 경희대 국문과 학생인 이향아가 김현승 시인의 '눈물'을 낭송하였다. 또박또박 박아 읽는 시의 감칠맛이 감동적이었고, 그때 나는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이향아가 김현승 시인의 '눈물'을 낭송한 것부터가 실은 이 시집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잘 알다시피 김현승 시인은 아버님이 목사님이셨고, 당신도 독실한 신앙으로 일생을 살았던 청교도 같은 시인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아마 김현승 시인의 그 무렵 시였을 것이다. 이 시 속의 '당신'은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향아 시인이 '현대문학'에 시 추천을 완료한 다음해에 나는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시골의 중학교에 근무하면서, 전주의 미션계 학교인 기전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동창 여교사와 열렬히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학교에 이향아 시인이 재직하고 있었다. 내가 동창에게 띄운 편지는 엽서가 많았고, 그 엽서에 나는 연시를 많이 썼었다. 말하자면 이향아 시인은 내 어설프고 치기 만만한 연애의 증언자로서 내가 보내는 공개적인 연시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십 년쯤 세월이 흘렀다. 내가 광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리고 살며 '원탁시'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향아 시인이 광주로 왔고, 같은 동인이 되었으므로 자주 서로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면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가까이 자주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이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신자로서의 이향아 시인을 가끔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여럿이 함께 하는 식탁에서 잠시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무심히 지나치곤 하는 것이다.
이향아 시인은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시인의 티를 내지 않는 사람, 대학 교수의 티를 내지 않는 사람, 기독교 신자의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이향아 시인이다.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잠깐동안 올리는 모습이 이제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스스로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항시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는 게 이향아 시인의 본바탕임도 이제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집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 묶은 시들은 모두 이향아 시인의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의 삶과 유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 속에 함께 녹아 있는 삶의 지표다.
최근에 이향아 시인은 <문학의 즐거움>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개인 홈페이지(www.poet.or.kr/ha)를 가지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 역시 그 사이트에 홈페이지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시인의 어떤 작품이 새로이 올려지고 있는지를 매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트의 첫 화면의 메뉴에서 '오늘 수록한 작품'을 열면 그 목록이 나오고, 그 목록 끝에는 독자들의 조회 수치가 나온다. 언제나 이향아 시인의 작품들은 독자들의 조회수가 월등히 높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계층이 대체로 중고생부터 대학생, 일반에까지 이르긴 해도 주로 청소년층이 많으리라 추측된다.
이향아 시인의 작품에 특별히 조회수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네티즌들은 올려진 작품의 제목에서 감을 잡고 그 글을 찾아 읽게 마련이다. 어쩌면 연가 풍의 제목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떤 시인의 경우 글의 내용은 별로 신통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움, 사랑, 고백, 그대'라는 어휘가 든 제목의 작품 조회수가 터무니없이 높게 나올 때가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독자(혹은 작가)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을(하마터면 나도 그럴 뻔했지만), 이향아 시인은 환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든, 그 수준과 태도가 어떻든 그런 것에 매달리지 않고 그냥 자신의 시에만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짓밟히는 것이
짓밟는 것보다 아름답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흐르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흐르는 내 피를 허락하겠습니다.
상처 속 흔들리는 가느다란 그림자
그 사람의 깃발을 사랑하겠습니다.
천년 후에 그것이 꽃으로 핀다면
나는 하겠습니다.
날마다 사는 일이 후회
날마다 사는 일이 허물
날마다 사는 일이 연습입니다.
이렇게 구겨지고 벌집 쑤신 가슴으로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몰라,
나는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 그것이 걱정입니다
여기서의 '당신'을 누구나 '시적 자아가 사랑하는 이'로 본다 해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여행 속에서 한 편의 시를 읽게 되는 청소년 독자들 거의 모두가 그 정도로만 받아들였을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굳이 틀린 것이라고 말리지 않는다. 그 '당신'을 시인 자신은 '절대자인 당신'으로 썼으면서도 굳이 그런 오해를 풀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그런 식으로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문학에 대하여 눈을 뜨고, 언젠가는 올바른 눈으로 시를 보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지 않겠느냐는 유연하고 깊은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한다, 라고 시인은 강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시력으로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여유로운 기다림과 그 믿음이 의연한 태산처럼 느껴진다. 하긴 시를 쓰게 된 나 자신도 사춘기 시절에 맨 처음 감동 받은 시는 김소월의 시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감성이 메말라 가는 각박한 세태 속에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고독은 내 영혼이 걸어온 길이었다. 나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높은 열도로 끓어오르게 하고 때로는 침잠시키면서 나를 절제하게 하고 나를 사치스럽게 하였다. 나에게 날개 달린 옷을 입혀 은밀한 시간, 광활한 곳으로 배회하게 하였다. 나는 그 때문에 나를 모독하는 일체의 것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나를 보호할 수 있었다.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었는가? 시는 진실로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었다. 각기 다른 의미를 달고 나간, 다른 이름들을 붙인 나의 시는 모두 나의 고독이었다. 물론, 시를 내놓 음으로써 내 고독이 위로를 받고 감량이 되고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위로를 받고 어쩌고 할 수 없음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독은 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꾸 더 빛나는 광채를 회복해 나가게 된다. 그것은 덜어내어도 덜어내어도 그만한 눈금으로 다시 차오른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각각 제 크기에 비례하는 마음의 여백, 조금씩 다른 크기의 고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
시인 스스로 밝힌 시론의 한 부분이다.
내게 있어서 시는 무엇인가? 이향아 시인은 "시는 내게 있어서 생명이다.", "시는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다.",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통이다.", "시는 나에게 있어서 고독이다."라는 네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에 대한 하나하나의 검증을 하였는데 마지막에 피력한 부분에서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생명의 이름을 걸고 시를 운위하는 것은 오히려 시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시는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시란 애초에 잉태되지 않는다. 사랑은 단지 시의 단서일 뿐이다. 사랑에는 헌신과 희생이 필수적이 아니던가. 이러한 점검을 거쳐 이향아 시인은 그 옛날 김현승 시인이 추구했던 것과 같이 '절대 고독'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면 지나칠까.
이 시집은 모두 네 묶음으로 나뉘어 있다. <당신의 피리>, <지금은 그대를 사랑할 때>, <목숨을 꽃밭처럼>과 <주기도문으로 열리는 예배>가 그것이다. 내 보기에 앞의 세 묶음은 그때그때 쓰여진 시들을 편의상 가른 것 같고, <주기도문으로 열리는 예배>만이 연작들로 시인의 의도적인 분류로 보여진다.
<당신의 피리>등 세 묶음은 일상의 삶에서 묻어난 신앙의 시들이다. 시인은 기도하기 위하여 특별히 조용하고 경건한 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곳, 지금 하는 일, 지금 이 시간이 바로 그에게는 기도를 바치는 성소가 된다. 살아가는 삶을 항시 반추하며 하나님을 찾는 모습은 늘 겸허하며, 그 목소리는 크지도 높지도 아니하나 간곡하기 그지없다. 이따금 우리는 교회에서 통회하거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높은 데 계시기에 큰 소리로 그렇게 외치는 기도를 올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외람된 말이 될는지 모르지만 흔히 그런 기도를 바치는 이들 가운데 독선적인 사람이 있고, 자신만의 믿음을 과시하려는 사람, 자기를 기만하며 처세하는 경우가 많음을 경험하곤 한다. 세상에는 종교를 하나의 사업 수단, 필요한 이력쯤으로 알고 생활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기도 소리가 비록 교회 안을 울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 임재하시며, 낮은 목소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로 하여금
당신의 피리를 삼으소서
맺힌 시름은 풀어서
산 넘어 보내고
노여움은 눌러서
잦아들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자랑만
봄풀처럼 봄풀처럼
일으키소서
나로 하여금
당신의 피리가 되게 하소서
가슴은 비워 꽃 그늘도 지고
기다리는 노래로 출렁이게 하소서
― 당신의 피리
시인은 당신 곧 하나님의 악기가 되고자 한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맺히게 되는 시름도 노여움도 눌러 잠재우고 오직 당신을 사랑하는 간절한 노래만을 부르고 싶어한다. 내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며, 순한 옥피리가 되어 나는 당신의 부름에 따르고자 하는 일이다. 이처럼 이향아의 시에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그의 순종하는 자세가 맑고 그윽하게 투사되어 있다.
정녕 이 시집 전체에 실린 시들은 하나님 당신을 사모하고 따름을 노래한 것들이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당신을 간절히 부르며 노래하는 시적 자아는 누구인가. 시인은 자신을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나는 하릴없는 소돔의 여자
물길어 밥하고
아이 품어 기른다.
나는 어리석은 소돔의 여자
허울뿐인 사랑에도
가슴 헐어 바치고
마른 땅 흙바람에
가랑잎처럼 운다.
― 소돔의 여자
땅 위의 끝날이
도적처럼 올지라도
믿기지 않아서 뒤돌아다 보리
혹시나, 잊지 못해
뒤돌아다 보리
성읍은 꽃바다
환호성 같은 불에 잠기고
그렇지만, 어리석어
돌아다보리.
역청 꿀물 문질러서
잡아끄는 유혹
벙어리처럼 두 팔 쳐들고
돌기둥
소금기둥
서서 죽으리.
― 돌아다보리
시적 자아는 스스로를 물길어 밥하고 아이 품어 기르며 세상살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수시로 돌아다보는 어리석은 여자, 끝내는 돌기둥 소금기둥이 되고 마는 저 소돔의 여자라고 고백한다. 망해 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면 지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잊지 못하여 돌아본다고 자책한다. 시적자아는 비극적인 자기 확인 속에서 돌기둥, 소금기둥으로 죽어간 모든 사람들과 자신이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화려했던 성읍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타오르고 아비규환의 처참한 소리가 들릴 때, 혹시나 하는 한 가닥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는 약한 인간은 시인 이향아만이 아니다. 그렇게 돌아다보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한 가닥의 유혹에 휘둘려 돌아다보는 모습, 오히려 그 속에 인간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요인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면 시인에게 있어서 돌아다볼 수밖에 없는 '일상'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여기서 다시 시인 자신의 말을 들어본다.
빨랫줄에 나부끼는 하얀 빨래, 설거지통의 비누거품, 아침밥을 먹고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 아름다운 색깔들, 문득 잡은 친구의 따뜻한 손, 이러한 사소하고도 시시한 것들이 나를 감격시킨다. 나는 시를 감격으로부터 출발시키기 때문에 내 시는 그 소재들이 모두 가상다반(家常茶飯)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 속에 잠복해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주변에서 그러한 일상사를 제외한다면 내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 일상적 생활, 일상적 언어
밥 짓고, 빨래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과 같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하찮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 사실은 인간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시인은 결코 격앙된 어조로 그 삶을 노래하지 않는다. 언제나 강물처럼 낮고 잔잔한 소리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다. 시인의 이러한 인생관, 시인의 철학이 바로 그 시인의 시를 낳는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반드시 좋은 삶에 바탕을 두며, 시인이 영위하는 삶이 바로 시를 싹티우는 토양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믿고 있다.
이향아 시인의 온건한 신념과 성실한 자세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아침에는 이슬이
저녁에는 안개가
나도 이만하면 넉넉합니다.
햇살은 너그럽고
새들은 짖어 쌓고
나도 이만하면 화려합니다.
― 아침에는 이슬이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고
돌아가서 먹을 저녁밥도 있습니다.
기다릴 가족이 있고
머리 숙여 간구할 소원도 있으며
소원을 풀어 달란 속 깊은 눈물
없는 것 없습니다. 나는 다 있습니다.
― 자족하기
시인은 주어진 자연과 일상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면서 자족하고 감사해 한다. 이만하면 넉넉할뿐더러 없는 것 없이 다 있노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러나 '자족하기'라는 시를 반대로 읽으면 정말 우리 삶이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알게 된다.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고/ 돌아가서 먹을 저녁밥도 있습니다. /기다릴 가족이 있고/ 머리 숙여 간구할 소원도 있으며/ 소원을 풀어 달란 속 깊은 눈물/ 없는 것 없습니다. 나는 다 있습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기 쉬운 평범한 삶이 사실은 얼마나 축복 받은 것인지 늘 감사하며 자족해야 한다고 이 시인은 조용히 깨우쳐주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이 장성하면 궁극에 가서는 사망을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홉을 가진 자가 겨우 하나를 가진 가난한 사람의 것을 넘보고 빼앗으려고 덤비는 무서운 세상에서 스스로에게 주어진 생활을 성실하게 사랑하면서 청빈으로 자족하는 이향아 시인의 마음이 가을 바람처럼 깨끗하고 상쾌하게 느껴진다.
이 시집 속에는 '잠듦'을 노래한 시가 여러 편 눈에 띈다. 낮이 광명이라면 밤은 암흑의 시간, 그리고 낮이 수고롭게 일하는 시간이라면 밤은 편안한 안식의 시간이다. 또한 낮은 선, 밤은 악의 시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잠든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의 시간과 일맥 상통하는 짧은 가사 상태일 수도 있다. 죽음과 잠이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잠은 내일 아침의 깨어남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잠에 들면서 내일을 믿고, 오직 당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함께 소리내어 주기도문을 외우고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거라,
안녕, 안녕
우리는 믿으면서 전등을 껐다.
낮에 사랑하던 것들
유순히 돌려보내고
드디어 전등을 껐다.
― 소등하면서
밤은
잘 익은 수박 속같이
깊고 화려하다.
돌아서지 못하는
시간의 벼랑에서
아이야,
자정에 쫓기어
내일로 밀려나기 전에
얌전히 모은 손 가슴에 얹고
시끄러운 세상은 잊어버리자.
― 오늘 잠은 오늘 잠들자
밤들어 시인은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의 낮 동안에 사랑하며 근심하며 분별하던 일들을 이제는 모두 접어야 할 벼랑의 시간(자정), 그는 심난하고 시끄러운 세상을 잠시 잊고자 한다. 어찌 생각하면 죽음 앞에서도 시인은 살아온 날들의 일을 돌이켜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하루(평생) 낮 동안 사랑하던 모두를 잊고 의탁하리라. 그리하여 밤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맞서려는 의지를 보이는 시가 '소등하면서'이다. '전등을 껐다.' 앞에 놓인 '드디어'라는 부사가 그 의지의 결연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잠들기 전에 아가서를 펼쳤습니다.
감람나무 그늘에 발목이 빠져
갈릴리 호수는 푸를까 흴까
암사슴이 사모하는 시냇물 자리
언덕 넘어 가는 길은 얼마나 멀까
이런 생각 할 때는 고적합니다.
아가서는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
음악처럼 울어서 꿈길을 적십니다.
평생을 근심으로 몸이 마른 예수여,
평생을 고적에 눈이 깊은
예수여.
― 잠들기 전에
암사슴이 사모하는 시냇물 자리, 언덕 넘어 가는 길은 얼마나 멀까 생각에 잠기며 시인은 잠을 기다리는데 아가서는 음악처럼 꿈길을 적신다. 그러므로 그 꿈길에서 시인이 만나고 싶은 이는 평생 근심으로 몸이 마르고 눈이 깊은 예수님일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는 누구나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향아 시인은 죄의식- 참회- 용서라는 일련의 자기 확인을 통해 은연중 머나먼 구원의 손길을 더듬어 찾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이런 일, 저런 일로 인하여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상처받을 수도 있고 그 상처로 말미암아 노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나의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 대해서 속 깊은 눈물을 흘리며 원망하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시인은 그 보이지 않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고 속죄하는 곱고도 섬세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 시에서 곡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날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보다.
용서받지 못할 일을 내가 저질렀나 보다.
그의 눈물 때문에 온종일 날이 궂고
바람은 서러워 온몸으로 우나 보다.
사시철 그래서 내 마음이 춥고
바람결 소식에도 귀가 시린가 보다.
―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궂은 날씨, 바람 불고 귀가 시리게 추운 날 문득 시인은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남에게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노여워서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울 미지의 이웃에게 시인은 마음의 문을 열고 용서를 구한다. 창문을 열고 깨끗한 물살처럼 빛나는 달빛 속에 용서를 구하는 시인의 마음이 백합처럼 향기롭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향아 시인이 이번 신앙 시집에서 펼쳐 보인 겸허한 삶의 자세, 낮은 목소리로 올리는 간곡한 기도, 그리고 깊은 신앙심의 일상들이 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크나큰 울림과 향기로 가득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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