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의 「짧고도 길어야 할」감상 / 강은교
짧고도 길어야 할,
이선영
그대와 나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지루하도록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져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 개 줄 가운데 어긋난 딱 두 개 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 속에 바람 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혀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은
이쯤에서 추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사랑의 박제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일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
ㅡ시집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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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패러독스다. 나와 사랑하는 이의 쓰라린 평행선을 시인은 그대와 나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시에는 평범한 구어체의 말을 쓰면서도 리듬이 생성되고 있다. 아마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감히 말하지만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은유로 깊이 숨어있지 않을는지? 언젠가 시인을 만나면 물어보리라.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인생이라는 것’의 자조적 표현들은 오늘 아침 한 사람과 마주 앉은 식탁에서 깊이 울릴 것이다. 마치 종소리처럼.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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