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의 「나이테」 평설 / 홍일표
나이테
서화
가뭄으로 저수지 바닥이 드러났다
뽀얗게 말라버린 가장자리를 짚으며 내려오는 산그늘
악물었던 이빨을 풀고 처박힌 냉장고를 기웃댄다
일그러진 문짝을 가리겠다고 수초들 힘껏 팔 뻗는데
멀리서 주위를 맴도는 왜가리들
냉동실에 떠다니는 물고기들을 살핀다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는 듯 부글거리는 흙탕물 속에서
곰삭은 햇살의 토막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저수지 층
낯익은 기록이다
물기 조금씩 빠져나갈 때마다
저수지 속 묵은 기록들이 환하게 드러난다
물도 제 나이를 적어두고 있었다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서 제 살 위에 적어두었다
어쩌면 눈물을 찍어 썼을지도 모른다
빈 냉장고를 끌어안고 있는 건
저도 섬 하나쯤 품고 싶었던 간절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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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돈을 주워본 적이 있는지요? 그런 분 있으면 지금의 제 심정을 이해할 겁니다. 어제는 2시간 27분 13초 동안 시를 찾아 다녔지요. 그러다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싶었지요. 아무튼 그 짓을 하다가 찾아낸 시가 서화의 ‘나이테’ 지요. 노동의 대가가 쏠쏠했습니다. 동전도 지폐도 아닌 백지수표였거든요. 지금부터 저는 구체적인 금액을 써넣기 전에 잠시 길을 에돌아갈까 합니다.
얼마 전 읽은 모 평론가의 엉터리 글이 생각이 납니다. 하는 족족 자기 자랑이요 나오는 것은 억지요 내미는 것은 무식이라 그 꼬라지가 하도 역겨워 조인트를 까주고 싶었지만 눈앞에 없으니 육두문자만 날리고 말았지요.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시작해서 송아지 똥 싸는 소리로 끝나는 글은 온통 현학적인 제스처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의 상당 부분은 원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더욱 화가 났고, 그 글이 자기 글인 양 떠벌리는 꼴은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 문단의 1급(?)의 평론가인데 뭔가는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끝까지 읽었지만 역시 젬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대한민국의 순진한 시인들은 위대하신 평론가 양반의 글을 읽고 뿅 간다는 거지요. 그 분의 글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지랄염병을 한다는 거지요. 술도 먹지 않았는데 제가 또 흥분을 하네요.
입 모양이 이상해지기 전에 다시 서화 시인에게 가겠습니다. 가뭄으로 흉물스럽게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 앞에 시인이 서 있네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수지에 버려져 있는 냉장고입니다. 이 시에서 냉장고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냉장고가 없었다면 이 시는 그렇고 그런 시가 되고 말았겠지요.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서 제 살 위에 적어’둔 기록이 보입니다. 그 기록은 삶의 아픈 흔적들이겠지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내밀한 상흔들을 가만히 들춰보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 불면의 시간들과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보입니다. 그 바로 밑에는 질긴 울음과 긴 한숨,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도 있습니다.
이 시를 살린 것은 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섬 하나쯤 품고 싶었던 간절함’ 때문에 빈 냉장고 하나 끌어안았다는 고백이 읽는 이의 가슴 한쪽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 간절함이 서화 시인을 시의 길로 이끈 것이겠지요.
옥의 티가 보이네요.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어쩌면 눈물을 찍어 썼을지도 모른다’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혹시 독자들이 잘 모를까봐 친절한 서비스를 하셨네요. 시에서 과잉친절은 금물입니다. 꼭 그 내용을 넣고 싶었다면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았겠지요. 서화 시인, 삶의 적막한 가장자리를 짚으며 내려오는 산그늘을 바라보면서 언제 술 한 잔 해야지요?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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