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의 「버려진 식탁」감상 / 김기택
버려진 식탁
이윤학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꽃병
속에 꽂혀 있던 꽃이 시들어
몇 차례 버려졌다. 그리고
꽃병 속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꽃병은 엎질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식탁은 저녁을 위해 차려진 적이
있었다. 의자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벗어놓은 옷이
뒤집혀, 의자 위에 쌓였다.
한 방에서 일일 연속극이 시작되고
한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엔 신문지와 영수증,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올려졌다. 한때는, 그곳에서 양파를 기른 적도 있었다.
양파 줄기는, 잘라내자마자 다시 자라났다. 점점 가늘어져
창문에 가 닿을 듯했다.
말라 비틀어진 양파 줄기 위에
더 많은 신문이 던져졌고,
영수증과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쌓여갔다.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많은 과일들이 썩어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것들을 들어냈다.
몇 해 전에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오랫동안 유리 밑에 깔려 있었으나,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 시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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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또는 한 가족의 삶이 요렇게 달랑 식탁 하나로 요약될 수도 있군요. 새 식탁을 사면 유리 깔고, 유리 밑에 행복한 사진도 끼우고, 꽃도 꽂아놓고, 따뜻한 저녁도 차리지요.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식탁은 책과 옷더미, 신문지, 냄새나는 쓰레기로 뒤덮여, 식탁이었던 기억을 잃고 잡동사니 받침대가 되지요.
한때 찍어 바르고 골라 입고 희망찬 앞날을 이야기하며 웃던 사람들의 일상은 곧 부동산과 대출, 아이 진학 문제, 악다구니, 한숨 따위가 차지해버리지요. 나는 '나'였던 기억을 잃고 온갖 삶의 잡동사니의 받침대가 되지요. 이 시의 묘미는 식탁의 길에서 사람의 길을 꿰뚫어 보기!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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