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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문정희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평설 / 김사인

by 솔 체 2015. 7. 19.

문정희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평설 / 김사인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문정희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못 볼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지금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을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실천문학》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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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로 하여금 사랑한다고 말하게 할 그 어느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해가 질 때”이리라고 이 시는 단언한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의 의지 너머에서 멀어지는 저 서서히 저물어감, 소멸과 스러짐 앞에서 몸과 욕망의 ‘입술’을 가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한숨처럼 새어 나올 ‘사랑한다’ 는 말 아니면 ‘숨죽여 홀로 울기’ 애달픈 몸과 ‘날 저뭄’(죽음) 사이에는 비극적이라 할 만한 긴장이 성립된다. 그 긴장의 지극한 형식이 ‘사랑’ 인 것. 그리하여 ‘사랑’ 은 죽음과 욕망의 두려움과 그리움의 착종 위에서 “숨 죽여 홀로” 울지 않을 수 없는 것. 때로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사랑” 한다는 말을 소리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슬프게도 ‘입술’을 가진 존재들이라면, 한 번은 서해 바닷가 어디로 떠나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볼 일이다. 그때 입술 새로 무슨 말이 새어 나오는지 들어볼 일이다. 문정희 시인의 관능은 때로 이렇게 눈부시다.

   

김사인 (시인)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9 올해의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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