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 홍일표
명일동 천사의 시
김춘수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
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
가고 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길을 가면 저만치
그의 발자국 소리 들리고
들리고
날개도 없이 얼굴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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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도 치매가 옵니다. 노망 든 시는 보기에 참 민망하지요. 차라리 지면에 발표를 하지 않으면 예전의 좋은 이미지가 더 이상 손상되지 않을 텐데 안타깝게도 맨 앞자리에 보란 듯 앉아 있지요. 저는 그 지경이 되면 누군가가 리볼버 권총으로 제 심장을 쏘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춘수 시인이 나이 여든이 되어 펴낸 시집『거울 속의 천사』를 다시 읽으면서 많은 걸 생각했습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적 긴장과 언어의 밀도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팽팽하고 조밀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함축의 묘미 또한 뛰어난 시들이 많았습니다.
「명일동 천사의 시」는 아내를 잃고 쓴 시입니다. 봄날 홀연히 아내는 이승의 끈을 놓고 곁을 떠납니다. 혼자 남은 시인은 고적을 견디면서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상실감으로 뒤척입니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시인은 ‘천사’라고 부릅니다. ‘희디흰 날개’ 는 천사가 된 아내의 맑고 정갈한 이미지이지요. 시인에게 아내는 죽고 나서 더 가까이 다가오는 실존입니다. 길을 걸을 때도 아내의 발자국 소리를 환청으로 듣습니다. 이처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더 절절하지만 아내는 지금 손으로 잡을 수도 말을 걸어볼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텅 빈 아파트에서 조용히 아내를 불러보아도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쓸쓸히 되돌아올 뿐이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있었던 아내의 빈자리는 큰 상실감으로 가슴을 저며옵니다.
이러한 심회가 잘 나타난 시가 「명일동 천사의 시」입니다. 이 시는 김춘수 시인의 이전의 시와 비교했을 때 확연한 차이점이 있지요. 생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온기 어린 숨결과 인간적인 삶의 체취가 여실하게 묻어나는 시입니다. 마치 아무 화장도 하지 않은 시인의 맨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이「품을 줄이게」입니다. 이 시는 후배 시인들에게 던지는 원로 시인의 애정 어린 고언이면서 뛰어난 시 지침서 같아 옮겨 봅니다.
품을 줄이게
김춘수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두게.
흘쩍 뛰어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
품을 줄이게
詩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
그 자국이니까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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