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가면 을 보는 두 가지 관점
시의 상상과 시적 진실성 / 윤애경
우리는 가끔 지쳐가는 일상에서 여운이 긴 시나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읽으며 위안 받곤 한다. 문학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이처럼 우리의 지난한 삶에 정서적인 활력소가 될 뿐만 아니라 삶의 좌표에 어떤 의미로 되새김질 된다. 그것에 내재된 삶의 진실은 현실의 삶 자체를 옮겨 놓은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미적 형상화라는 모종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진다.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 혹은 ‘허구(픽션)’라는 옷을 입고서 우리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반면에 시의 깊은 울림 안에서도 역시 픽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아무래도 조금은 낯설다. 우리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소설이 자전적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허구로 읽는 장르임에 비해 시는 허구적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자전적으로 읽게 되는 장르적 관습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강인한의 「붉은 가면」은 시의 픽션과 시적 진실이 잘 조화된 시편이라 할 수 있겠다. 시 전문을 한번 읽어보자.
걸쭉한 노을이 거대한 레미콘에서 빠져나와
까무룩 잦아드는 교정,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키 큰 나무들
시커멓게 날개 접은
가지와 가지에서 불길한 예언처럼 흘러나와
정문의 사비오 동상에서 루르드 성모동굴 쪽으로
떼 지어 날아가는 것들,
그렇게 찍찍거리는
츳츳츳 침을 뱉는
날개 치는 수백 마리 저것들은 박쥐, 박쥐 떼였다.
동굴에서 걸어나온 오월의 성모가
지그시 밟고 선 발밑
두 갈래 빨간 혓바닥을 입에 문 뱀이 몸부림치는 밤,
박쥐 떼가 달려들어
우리들의 악몽을 향해 할퀴며 덤벼들어…….
아침 햇살이 황금빛으로 비치는 성모동굴 앞
땅바닥에 시든 장미처럼 나뒹구는 건
간밤 박쥐들의 저주가 끈적거리는 우리들의 얼굴,
붉은 가면들이었다.
—강인한 「붉은 가면」전문
이 시의 주제는 인간들의 사악한 가면을 벗기고자 하는 자정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시의 현실적 배경은 1연에서 3연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가톨릭학교 교정에 박쥐 떼가 날아다니고, 학교 정문에는 사비오 동상이 있고, 한쪽 곁에는 성모동굴이 있다. 사비오 동상은 그 학교의 성인 동상일 수도 있고 혹 학교의 설립자의 동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소재에 덧붙여진 시인의 상상은 4연과 5연에서 픽션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4연에서는 성모동굴에서 걸어 나온 성모가 밤에 사악한 뱀을 밟고 서 있고, 뱀은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데 박쥐 떼가 달려들어 우리들 악몽을 할퀴고 있다. 우리들 악몽은 우리 인간들의 사악한 면에 대한 비유이며, 그것은 뱀의 사악한 측면과 오버랩되고 있다. 이어 5연에서 다음날 아침 성모동굴 앞에 시든 장미처럼 죽어 나뒹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얼굴 ‘붉은 가면(사악함)’이었다고 그려진다.
이 시에서 성모가 걸어 나오고 사악한 뱀을 밟고 서 있는 장면은 픽션이다. 특히 성모의 발 밑에서 두 갈래 빨간 혓바닥을 입에 문 뱀이 몸부림치는 장면은 가톨릭 레지오 마리에 단원의 뗏세라(Tessera, 가톨릭 교회의 공인 단체인 레지오 마리에에서 레지오의 기도문과 레지오의 그림이 실린 낱장의 인쇄물을 가리키는 용어)에 있는 그림을 연상케 한다. 시인은 뱀(사악함)과의 싸움에서 성모가 승리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이 그림을 통해 인간들의 사악한 면도 정화가 되었다는 시적 상상을 끌어내고 있다.
이처럼 시에서 픽션 부분은 구체적인 형상화 과정이다. 시적 진실성은 픽션의 요소가 없으면 확보되기 어려우며 그것은 상상에 의해 가능해진다.
—《시와 지역》2010 가을호, 「강단 비평가의 시읽기(1)」에서 발췌.
윤애경 : 문학평론가,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작된’ 욕망을 거부하는 언어와 영혼의 서지(書誌) / 김륭
어떤 시인의 초대에 응하려면 먼저 그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한다. 이때 시는 시인이 가진 하나의 욕망임과 동시에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시는, 내가 초대장을 받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초대에 응해 주시겠습니까? 문제는 선택이다. 구태의연한 이야기겠지만, 선택은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특정 유전자의 조성을 가진 개체들이 살아남게 되거나 제거되는 것을 일컫는 생물학 용어다. 결론부터 말해 선택은 ‘진화’의 문제다. 백과사전을 빌려 인위선택(선택교배)은 생물 스스로에게 유익하기보다는 경제적 또는 심미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전적 변이가 조작된다는 점에서 자연선택과 다르다는 등등의 생물학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보다 시적으로 선택은 살아남은 생물들의 언어에 관한 해석을 동반한 고통의 문제를 건드리고 싶은 것이다. 예컨대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있는 초대가 있는 반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초대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시인이 보낸 초대장에는 하나의 길이 존재하지만 초대장을 받아 쥔 사람의 손에서 길은 최소한 두 갈래 이상의 길로 나누어진다. 물론 이때의 길은 나누어지면서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나누어지는 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초대장에 대한 지극히 위험한 서지(書誌)이자 그만큼 다채로운 목록이다.
언어로 만들어진 시가 지닌 매혹은 입술이 아니라 목숨에 있다. 이건 어떤 해석이나 해명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초대장을 받기 전부터 시작된 ‘영혼’의 문제다. 이를테면 “내 딴에는 목숨을 걸고 썼다.”는 어떤 시인의 초대장을 받았다면 당신은 과연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있겠는가. 올해 제42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 강인한 시인의 수상소감은 독자에게 보내는 초대장이 아니라 이 나라 시인들에게 보내는 부고장인 줄도 모른다.
“시집 출판을 문의하는 과정에서 제 나이가 많고 한물간 60년대 시인이라는 편견에 부딪혀 막막할 때, 차라리 생판 낯선 신인 이름으로 나서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어떤 이는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하여 성실한 일상인의 생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동의할지라도 저는 시에 처음 입문할 때의 초심을 기억합니다.”
“목숨을 걸고 쓴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40년 넘게 열정적인 시작을 해온 강인한 시인의 이 한마디 앞에 삼류시인의 허접한 리뷰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푸른 심연』등의 시집을 통해 이미 문학적 역량을 충분히 입증했지만 강인한 시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미래의 영역이다. 즉 제42회 한국시인협회상 심사평을 넘어 새로운 조명이 기대된다는 뜻이다. (지난해 7월 발간한 시집 『입술』에 실려 있는 시들은 60대 후반의 시인이 쓴 작품들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싱싱하고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격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시단에 잔잔한 충격을 던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삶을 관조하며 편안히 응시하는 자세를 보이는 시인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강인한 시인은 오히려 생에 대한 열정과 젊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제42회 한국시인협회상 심사평에서)
걸쭉한 노을이 거대한 레미콘에서 빠져나와
까무룩 잦아드는 교정,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키 큰 나무들
시커멓게 날개 접은
가지와 가지에서 불길한 예언처럼 흘러나와
정문의 사비오 동상에서 루르드 성모동굴 쪽으로
떼 지어 날아가는 것들,
그렇게 찍찍거리는
츳츳츳 침을 뱉는
날개 치는 수백 마리 저것들은 박쥐, 박쥐 떼였다.
동굴에서 걸어나온 오월의 성모가
지그시 밟고 선 발밑
두 갈래 빨간 혓바닥을 입에 문 뱀이 몸부림치는 밤,
박쥐 떼가 달려들어
우리들의 악몽을 향해 할퀴며 덤벼들어…….
아침 햇살이 황금빛으로 비치는 성모동굴 앞
땅바닥에 시든 장미처럼 나뒹구는 건
간밤 박쥐들의 저주가 끈적거리는 우리들의 얼굴,
붉은 가면들이었다.
—강인한 「붉은 가면」전문
강인한의 시편들은 정제된 언어로 엮어낸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라는 그의 말은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키 큰 나무들/ 시커멓게 날개 접은/ 가지와 가지에서 불길한 예언처럼 흘러나와/ 정문의 사비오 동상에서 루르드 성모동굴 쪽으로/ 떼 지어 날아가는 것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사이의 공간(세계)에서 무엇이 밖이고 무엇이 안일까? 진지하고 견고한 언술로 보여주는 그의 세계관을 엿보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귀를 달아야 한다. 이건 일부 평자들이 말하는 영원한 에로티시즘의 미학 혹은 탐미주의적 관능미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영혼의 문제다. 쉽게 말해 그의 시편이 돋보이는 것은 한마디로 ‘조작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찍찍거리는/ 츳츳츳 침을 뱉는” 가만히 몸을 기울이면 얼굴로 침입하는 소리들, 시인 특유의 깊고 날카로운 시선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영혼의 소리마저 물질화시킬 만큼 팽팽한 울림을 갖는다. 불길하고 불행한 전언이긴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의 내면을 뒤집어보면 “땅바닥에 시든 장미처럼 나뒹구는 건/ 간밤 박쥐들의 저주가 끈적거리는 우리들의 얼굴/ 붉은 가면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이 얼마나 될까.
한 편의 시를 통해 시인이 변주하는 언어와 시인이 가진 영혼은 어떤 관계일까. 행여 시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이어야 할 시공간을 분리하고 서로를 할퀴며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시는 언제나 시인이 가진 욕망 위에 있고 이때의 욕망은 시인의 몸 안팎을 관통하며 흐르는 물길이다. 물길은 안쪽은 바깥쪽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걷는 길과는 다르다. 안과 밖의 풍경이 동시에 주어진다.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안과 박은 하나의 행간으로 서로 겹치며 언제나 함께 어울리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한다. 뛰어난 혜안을 가진 이가 안의 풍경과 밖의 풍경을 분리해 본다고 하더라도 둘 중 하나는 아직 모르는 영역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시공간은 우리가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영혼의 문제다. 우리는 언제나 낯설고, 낯선 존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심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몸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시적 울림은 여기서부터 발원한다. 동요가 미약하다 하더라도 균열은 우리가 가진 하나의 세계를 무화시키거나 통째로 부정할 수 있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가 내가 가진 물길의 바깥이고 영혼이 안쪽이라고 굳이 가정하지 않더라도 한 편의 시를 변주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시와 지역》2010 가을호, 「시와지역 리뷰」에서 발췌.
김륭 :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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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붉은 가면」의 배경에 대하여 / 강인한
70년대 말 광주의 그 학교는 30년 가까이 된 校舍가 노후해서 목조건물의 틈과 구멍에 많은 새나 쥐, 박쥐 등이 서식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수백 마리 날개 달린 것들이 늘 같은 시각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퍼덕퍼덕 날아들었는데, 처음엔 참샌 줄 알았던 그건 박쥐들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게 80년 5월의 비극을 예언하는 기분 나쁜 징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태리에서 그 이름의 학교를 맨 처음 설립한 이는 돈 보스코라는 신부님이었답니다. 그 신부님이 존경하는 ‘聖人’의 이름을 따서 校名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광주의 그 학교는 교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원형 화단 중앙에 도밍고 사비오라는 소년 성인의 대리석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본받을만한 성품의 소년 성인, 열다섯 살에 善終한 성인이라 했습니다.
모든 성모상은 맨발이고 발밑에는 뱀이 괴롭게 꿈틀거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뱀은 사탄의 상징인 것이지요. 루르드 성모동굴을 본떠 만든 학교 ‘성모동굴’ 앞에서 해마다 5월이 되면 ‘성모 성월’ 행사를 경건하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6월이 되면 ‘성모동굴’ 둘레에는 빨간 덩굴장미가 아름다웠지요. 1980년 그해 5월에도 ‘성모 성월’을 지내다가 그런 무섭고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핏빛 노을이 검은 어둠으로 변할 때 한꺼번에 나타나는 박쥐 떼의 기습.
그로부터 몇 해 지나, 학교는 멀리 도시의 변두리로 이사 갔습니다. 처음 세워진 학교 부지는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 뒤라서 옛날의 흔적은 이제 아무것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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