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산의 「나도 그들처럼」감상 / 손택수
나도 그들처럼
백무산(1955∼ )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이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시집『거대한 일상』(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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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저주다.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우리는 알기 이전에 체득하고 있던 세계를 잃어버린다. 무서운 것은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마저 잊고 산다는 점이다. 발바닥에 단단히 굳어버린 소용돌이무늬를 닦고 또 닦는다. 계산과 측량과 해석과 부동산과 시계 너머, 가마꼭지 끝으로 숨을 쉬던 세계를 기억하기 위하여.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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