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전율과 황홀 / 홍일표
어두운 부분
김행숙
내일 저녁 당신을 감동시킬 오페라 가수는 풍부한 감정과 성량을 가졌다. 예상할 수 없는 감정까지 당신에게.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이 사실일 때에도 내일까지 바닥을 끌고 가는 긴 드레스 속에는 발목이 두 개, 곧 끊어질 듯. 젖도 크다, 곧 터질 듯.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은빛 칼처럼 빛이 쑥 올라오는 틈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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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를 빛낸 대표 시인 중에는 이상, 백석, 미당 서정주, 김수영 등이 있다. 그들이 시사에 남긴 크고 눈부신 발자취를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독자들은 대표 시인들을 우상화하여 이상교, 백석교, 미당교, 김수영교 등의 교파를 만들어 그들을 추앙하고, 혹여라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으면 신성모독죄로 처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절대왕권에 도전하려는 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맹신의 습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비평가들로부터 집중적인 찬사를 받고 있는 몇몇 인지도 높은 시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독자들이 있다. 그들의 시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하지도 않고, 인정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 과대포장 되어 시장에 유통되고 실제와 달리 하나의 신화로 격상되어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시장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은 비평가들도 대세에 몸을 맡겨 줄줄이 한 목소리를 내게 된다. 신화는 계속 복제 재생산되어 비평의 칼날은 오뉴월 엿가락처럼 축축 늘어져 제 역할을 못하게 되고, 신화의 브랜드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김행숙 시인은 작품과 비평의 거리가 가장 근접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작품과 비평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가짜 신화의 외양은 화려하고 요란한 법이다. 천재, 최고, 수작, 명작, 가편 등의 수사를 남발하여 독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온갖 치장을 하여 똥무더기를 황금덩어리로 만든다. 김행숙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그런 혐의를 가질 필요가 없어 다행이다.
「어두운 부분」은 감각적 시읽기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경우 시의 깊은 맛을 놓치기 쉽다. 오페라 가수는 풍부한 성량과 감정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 가수의 몸을 통해서 표현되는 음악은 인간을 삶의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을 갖게 하지만 ‘대부분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의 표현이다.
3연에서 화자는 독자의 시선을 슬쩍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고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고백을 한다. 시상의 전환에 독자의 걸음이 멈칫 한다. 화자가 얼굴을 들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독자는 ‘바닥을 끌고 가는 긴 드레스’를 발견하고, 의상 아래 감추어져 있는 끊어질 듯한 발목과 터질 듯한 가슴을 만난다. 화려한 치장에 가려져 있는 생의 통증이 선연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꽃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둡고 신산한 삶의 풍경이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보는 것 같다.
이어서 믿기지 않는 놀라운 생의 전경을 목도한다. 무대의 바닥을 내려다보던 화자는 ‘은빛 칼처럼 빛이 쑥 올라오는 틈새’를 보는 것이다. 순간의 전율과 황홀이 잠시 눈앞을 아뜩하게 한다. 틈새로 올라오는 빛이 심장을 뚫고, 어두운 몸 안을 환하게 밝히는 순간이다.
나는 앞으로 김행숙 시인이 ‘틈새로 올라오는 빛’처럼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시를 쓸 것으로 믿는다. 우리 시사의 일정 부분을 떠맡을 것이기에 그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그만큼 남다른 것이다.
홍일표
(문화저널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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