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구의 「가을이라고 하자」평설 / 신형철
가을이라고 하자
민 구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공주의
복사꽃 치마를 벗긴 전공으로
계곡타임즈 1면에 대서특필됐다
도화국 왕은 그녀를 밖으로 내쫓고
문을 내걸었다 지나가던 삼신할미가
밭에 고추를 매달아놓으니
저 복숭아는 그럼 누구의 아이냐?
옥수수들이 수군대는 거였다
어제는 감나무 은행이 털렸다
목격자인 도랑의 증언에 의하면
어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라는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냐며, 조사 나온 잠자리에게 도리어
씩씩대는 거였다
룸살롱의 장미가 봤다고 하고
꼿꼿하게 고개 든 벼를 노려봤다던,
대장간의 도끼가 당장 겨뤄보고 싶다는,
이 사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버스 오기 전에
몽타주를 그려야 하는데
————
민 구 / 1983년 인천 출생. 2009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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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동화적 상상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자주 보인다는 지적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동화’란 대개 현실의 부조리를 확대해서 보여주기 위한 볼록렌즈로 채택된 ‘잔혹동화’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이 시는 천진무구하고 익살스러운, ‘잔혹’이 없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다른 시인들의 볼록렌즈를 눈 부릅뜨고 함께 들여다보느라 다소 피로해진 눈이 시원해지는군요.
그러나 ‘동화적’이라고 해서 이 상상력이 상투적이라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도대체 ‘가을’을, 강의 공주와 염문을 피우고, 은행을 털고, 룸살롱을 출입하고, 싸움질깨나 하는 그런 난봉꾼에 비긴 것은 얼마나 신선한 상상력입니까. “몽타주를 그려야 하는데” 한 줄 띄고 이 마지막 구절을 적은 것도 참 잘한 일.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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