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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벽의 흐느낌을 듣는 시인 / 홍일표

by 솔 체 2015. 10. 30.

벽의 흐느낌을 듣는 시인 / 홍일표

 

 

   이병률

 

 

책상을 짜러 찾아간 목공소 문간에 걸터앉아

목수를 기다립니다.

토막토막 잘린 나무를 가져다 못을 박기 시작합니다

뜨겁게 못을 박다가 그만 비정을 박는 건 아닌가 하여

조금 앉아 있습니다.

덩어리를 얼추 다 맞추었는데도 목수는 오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돌아와서

몇 번이고 돌아오는 버릇이 있는 나는

돌아오고 압니다

박을 것들보다

뽑을 것들이 많다는 것을

 

밤 늦게 산책을 나갔다가

뭐든 주워오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날도 남이 버린 선반을 가뿐히 들고 돌아옵니다

 

돌아오고 나면 또 압니다

못을 칠 수 없다는 것을

 

한 사람 심장에 못을 친 사실을

이후로 세상 모든 벽은 흐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바람에 벽을 다 써버렸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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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는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잘 알지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시는 읽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살 없이 뼈만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는 시도 읽기 괴롭지요.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시도 덜 익은 땡감처럼 고역스럽습니다. 아무튼 시 쓰는 일이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언어의 설사라 할 만큼 요설이 심한 시, 곰곰 읽어보면 한낱 말장난이나 공소한 언어 수사로 끝나는 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병률의 「못」은 편하게 읽히는 시입니다. 똥폼도 개폼도 없이 진솔합니다. 관념의 과잉이나 부처님 배꼽 잡고 웃게 하는 어설픈 깨달음의 몸짓도 보이지 않습니다. 툭하면 노자, 장자를 인용하고 부처님 말 끌어다가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시도 많지만 「못」은 생체험을 통해 얻은 진신사리 같은 시입니다.

   화자는 목공소에서 목수를 기다리며 버려진 나무토막에 무심코 못을 박습니다. 그러다 ‘비정’을 박는 건 아닌지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이런 찰나의 사유가 시로 이어지는 경우 실패할 확률이 적습니다. 일단 시의 각이 바로 서게 되니까요.

시인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합니다. 이 시에서 돌아온다는 행위는 대상의 껍질 속에 숨어있는 속살을 들여다보는 존재에 대한 응시입니다. 돌아와서 생각한 것은 ‘박을 것들보다 / 뽑을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는 건지도 모릅니다.

   3연에서 밤늦게 산책을 나갔던 시인은 남이 버린 선반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돌아와서 화자는 다시 못을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 심장에 못을 친 사실을’을 떠올리고, ‘세상 모든 벽은 흐느끼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벽’은 내가 상처를 준 그 누구이겠지요. 그리하여 ‘그 바람에 벽을 다 써버렸다는 사실도’ 아프게 깨닫습니다.

   자칫 상투성에 빠지기 쉬운 소재를 가지고 시인은 성공적으로 한 편의 시를 마무리합니다. 평이한 소재도 누구의 손에 쓰이느냐에 따라 이렇게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지요. 다만 어떻게 새롭게 보여주느냐만 있습니다. 이 시는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절하게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경직되지 않은 시의 보법을 보여주는 「못」은 겨울의 초입을 따듯하게 해줍니다.

   이런 시를 읽을 때 누군가의 가슴에 못을 박은 일이 없는가를 생각하게 되지요. 저 역시 여태껏 살아오면서 ‘뽑을 것’이 더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홍일표

(문화저널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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