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 시조 「고요」 감상 / 손택수
고요
이종문 (1955∼ )
붉은
고추를 먹은
잠자리 한 마리가
억 년 고인돌에 슬그머니 앉는 찰나
바위가 우지끈, 하고
부서질 듯
환한,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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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형을 따라 선을 그어 보니 잠자리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다. ‘찰나’를 향해 길게 흘러내린 중장이 몸통이라면, 단어와 구로 짧게 끊어낸 초장과 중장은 날개다. 그 사이의 여백이 날개와 몸통 사이를 잇는 모세혈관 같은 것일 테다. 여백을 따라 망사무늬 날개가 가늘게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정밀하게 교직한 고추잠자리를 ‘붉은 고추를 먹은’이라 능청맞게 풀어 쓴 것도 흥미롭고, 바위의 무거움과 잠자리의 가벼움을 대조하기 위해 살짝 끼워 넣은 부사 ‘슬그머니’도 여간 아닌 솜씨다. 잠자리의 ‘슬그머니’와 바위의 ‘우지끈’은 또 얼마나 유쾌한 대조인가. 생기로 가득 찬 잠자리의 찰나와 억 년 고인돌의 무한한 시간이 교감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 풍경에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깊은 고요를 안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인가.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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