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호주머니 속 악어」평설 / 우진용
호주머니 속 악어
강인한
내 호주머니에 악어가 산다
볕 좋은 날 호주머니를 까뒤집고 탈탈 떨면
있다
구석으로 구석으로 숨던 땀나는 시간과
병든 사람의 기억처럼 헐떡거리던 섬모와
참을 수 없는 것들이 그리워
실실이 빠져나온 담뱃가루 속에
그 속에 있다
추분 가까운 어느 가을날
호주머니를 떨어내다가, 공기 속으로 떨어져나가는
은빛 빛나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차마 꺼내기 어려운 고백의 첫 발음인지
몰라, 숨기고 싶은
추한 욕망의 한 자락인지 몰라
악어의 벌린 입 속에, 사내는
제 손을 넣었다가 한참만에 꺼낸다
악어의 벌린 입 속에 이번에는
제 머리를 넣었다가 한참만에 꺼낸다
어쩌면 사내의 위험한 저 행동의 끝에는
피 묻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예비되어 있을 것
내가 그대에게 결정적인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머뭇거리는 입술이 첫 음절에 매달려 목마른
호주머니를 뒤질 때
악어가 덥석 내 손목을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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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머니와 악어라는 생경한 이미지들이 충돌하면서 시적 긴장을 처음부터 팽팽하게 끌어내고 있다.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통한 이미지의 돌출이 새로운 상상을 끌어내는 현대시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악어의 정체다. 시인은 패를 언뜻 보여주면서 자신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차마 꺼내기 어려운 고백의 첫 발음인지/ 몰라, 숨기고 싶은/ 추한 욕망의 한 자락인지 몰라”, 악어는 마음이라는 늪 속에 감추고 싶은, 파충류처럼 다루기 어려운 삶의 비의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추분 가까운 어느 가을날” 같은 인생의 황혼 길에서 문득 “참을 수 없는 것들이 그리워/ 실실이 빠져나온 담뱃가루 속에/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욕망의 드러냄보다 욕망의 감춤으로 점철된 여정이 아닐까. 아직도 시인은 욕망을 꿈꾸면서도 욕망을 억누르는 자기모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욕망이란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쩌면 사내의 위험한 저 행동의 끝에는/ 피 묻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욕망을 감출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변명하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욕망이야말로 생을 생답게 만들어주는 원초적 자아의 또다른 이름일 것이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욕망은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며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주전자 뚜껑이라는 에고나 슈퍼에고에 막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악어라는 욕망을 늪에 가둬두고 남들이 악어의 존재를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일 게다.
어쩌면 시인은 젊은 날 “결정적인 무슨 말”을 고백도 못한 것을 후회하는지도 모르겠다. 두 갈래 길에 서서 선택할 수 없었던 그 길(또는 사람)에 대한 회한의 메아리라도 듣고 싶은 것일까. 허나 가슴속 정한도 삭여지듯이 욕망도 오래 묵히다 보면 그리움도 되는 것을….
“내가 그대에게 결정적인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머뭇거리는 입술이 첫 음절에 매달려 목마른/ 호주머니를 뒤질 때/ 악어가 덥석 내 손목을 문다.”
당신의 악어는 어디에 숨었는가?
우진용 〈시인〉
— 리뷰시 2010 《화요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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