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의 「촛불」감상 / 이진명
촛불
송찬호(1959~ )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 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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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에 누가 파랗게 언 가난한 두 손을 비벼 촛불을 만들어낸 적 있던가. 어깨를 촛대로, 팔을 양초로 만들어낸 적 있던가. 시 전체에 내장돼 전해지는 드높은 순결의식. 존재의 온전히 헐벗음 자체, 바닥이 된 절실함에 감정이입이 되어 시에서처럼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는 나의 형상을 수차례 그리곤 했다. 빈손에 촛불이 켜지는 기적이 시에서 일어나는 걸 보며 희망과 사랑의 창조, 시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았다.
이진명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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