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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한성례의 「고향우물」 감상 / 김기택

by 솔 체 2016. 2. 10.

한성례의 「고향우물」 감상 / 김기택

 

 

고향우물

 

   한성례

 

 

피를 모으느라 여자들은 몸이 들쑤신다

흙은 온몸으로 지하수를 돌게 하고

길을 내며 모여든 피의 열기로

늘 자궁은 뜨겁다

한 달에 한번 물을 바꿔 넣으려고

여자들은 우물가로 모이고

 

집중되는 시선이 두려운

고향마을 천수답 한가운데

하늘 향해 뻥 뚫린

내 어릴 적 우물

여자들은 달구어진 몸이 뜨거워

물을 퍼내고 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감추어둔 죄

속절없이 솟구치던 뜨거움

한여름에도 뼈 속까지 차가운 물

바가지로 푹푹 퍼서 끼얹던 고향우물

 

그 우물가로

전생에 죄진 생들이 

스믈스믈 모여들고

실뱀으로 구렁이로 꽃뱀으로

매달리거나 물구나무 서 있다

생전에 열기 식힌 우물가 

물기 있는 몸이라 어쩔 수도 없던

황홀한 죄 따라 돌아오고

 

문둥병 걸려 소록도 떠난 남편 자리

시동생으로 대신하다 태어난 아이

우물에 던져 넣은 여자

청상과부로

젊어서 혼자된 시아버지

물기 적신 여자, 여자들

 

내 기억의 우물가에는

꿈에서조차 소문이 범람하고 있다

 

 

   출전_ 《시평》 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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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례 /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1986년『시와 의식』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한국어 시집으로 『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빛의 드라마』 등을 펴냄. 번역서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토파즈』『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등이 있음. 허난설헌 문학상, ‘시토소조(시와 창조)상 등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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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우물에서 물을 길었던 생각이 납니다. 우물물이 가득 담긴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 너무 무거워 몸이 우물의 축축한 어둠과 깊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감이 들곤 했지요. 우물에 송장이 있다든가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던가 하는 무서운 소문도 돌곤 했지요. 우물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어 그 두려움에 대들어보기도 했지요.

   물이 모이고 여자들이 모이고 말들이 모이고 호기심 많은 소문들이 모이는 곳.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은밀한 불륜과 수군거림과 비아냥거림과 온갖 슬픈 에필로그를 제 어두운 깊이 속에 감추어 둔 곳. 그 비극을 다 지켜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그 비밀을 지켜주는 곳. 마을마다 있던 그 우물이 거의 사라졌으니, 뜨거운 피는 누가 식혀주고 비밀은 누가 지켜줄까요?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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