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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허만하의 「틈」감상 / 함민복

by 솔 체 2016. 2. 17.

허만하의 「틈」감상 / 함민복

 

 

   허만하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렁한 낙타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

 

   지층 속에서 원유처럼 일렁이고 있는 쓰러진 나자식물 시체들의 해맑은 고함소리. 바위의 단단한 틈. 뼈와 살의 틈. 영혼과 육신의 틈. 빵과 꿈 사이의 아득한 틈.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우울한 원두빛 향내와 정액빛 밀크 사이의 틈. 외로운 액체를 젓는 스푼.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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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구한 시간의 틈(나자식물), 광활한 공간의 틈(지구), 첨예하게 대립하는 관념의 틈(진화론과 상호부조론), 현실의 틈(빵과 꿈), 질감의 틈(바위), 존재 형태인 기체와 액체의 틈(향내와 밀크)…,

   틈의 세계가 참 넓고 깊군요. 틈 하면 좁거나 딱딱한 것들의 사이를 떠올려 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물리적으로 보면 틈은 허공 아닐까요. 아무리 큰 틈이라도 틈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허공의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요.

   사물과 사물 사이가 그렇듯 관념과 관념 사이도 틈이 경계를 나누면서 연결하고 있네요. 틈은 포괄적이고 배타적이네요. 틈이 없으면 개체가 존재할 수 없겠네요. 무한천공의 한 자락인 틈의 힘을 빌려 존재하다가 틈으로 돌아가, 틈이 되어 틈을 남기는 것이 개체군요. 어떤 존재보다도 틈의 시공은 무궁무진하지요. 그래서 모든 존재는 거대한 틈 사이에 간신히 틈을 내며, 틈의 틈으로 존재하는 것이군요.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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