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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문명으로부터의 일탈과 전복, 송찬호의 「가방」/ 홍일표

by 솔 체 2017. 2. 20.

 

문명으로부터의 일탈과 전복, 송찬호의 「가방」/ 홍일표

 

가방

 

   송찬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질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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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찬호의 시가 사뭇 편해졌지만 경계의 지점까지 치고 나가는 저돌성이나 부정형의 이미지를 안고 내달리던 과거의 야성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도식화의 위험은 잘 피해가고 있지만 한때 잘 나가던 몇몇 시인들처럼 자칫 익숙한 서정의 안온한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시와 현실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외줄 타듯 건너며 그의 시를 시답게 하던 낯설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송찬호 시의 특이한 매력이었다.

   이 작품은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잘 드러난 시다. 전복적 상상력에 기초한 ‘가방’은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가방과 죄수의 대립은 문명과 자연의 갈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 시의 요체이다. 화자의 즐거운 상상력은 각 연에서 경쾌하게 약동한다.

   가방은 근대적 사유에 기초한 문명의 폭압적 상징물이다. 탈옥한 죄수는 ‘풀밭’과 ‘강물’의 다른 이름이고,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질’하던 무소였다. 3연에서 화자는 행복한 상상에 젖어 문명의 거리를 종횡으로 휘젓고 다니는 본래 자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지만 그것은 단지 가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4연에서 가상의 현실이 현실화될 때 문명의 기반 위에서 연명하는 현대인의 초상이 보인다. 그 모습은 삶의 구각을 깨고 각성화 된 자아가 현실에 반응하는 모습이다. 현실과 자연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때 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를 살펴보는 존재에 대한 조심스런 탐색이요 탈문명적 사유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연과 문명을 선과 악, 또는 근대와 탈근대의 교조화 된 논리로만 접근하는 것은 지양해야 되겠지만 송찬호의 ‘가방’은 존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탈옥한 가방은 문명의 야만으로부터의 일탈이며 현대인이 상실한 낙원에 대한 염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저기, 무소 한 마리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간다. 언제나 규정 불가능한 시처럼!

 

홍일표

(문화저널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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