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준의 「나쁜 신앙」평설 / 문혜원
나쁜 신앙
박성준
거짓을 말한다. 교복 입은 여자애 어깨를 만지고 싶다. 늘 내가 탐하고 싶던 어깨에는 크리넥스 화장지가 한 통씩 들어 있었지. 잡으려 하면 할수록 한 장씩 풀려나오는 희고 얇은 어깨들. 앓던 병이 지나가는 길마다 풍성한 휴지들이 바람에 날린다. 비밀스럽군, 비밀스러워. 대체 누가 고안해낸 생각일까?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풀다가도 생각한다. 휴지를 풀어 손바닥에 감을 때마다 옮겨오는 비밀들. 풀고 나면 같은 자리에서 멈추는 휴지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홀쭉해진다. 이것을 누가 중심을 따라 모여 있는 집합체라고 말할까. 혹은 중심이 비어 있다는 것이 두루마리의 형식이라고 금기를 깰 것인가. 어느 날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전부 다 풀어다가 다시 감아본 적도 있었지. 그때 생기는 틈, 그것이 나다.라고 우기면 누가 믿어줄까. 습관적으로 나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던 애인, 끝끝내 미안하다며 무명천에 붙은 찢어진 제 처녀막을 내밀었을 때. 그렇지 않다면 검은 장정들에게 포박당한 아비가 각서에 지장을 찍고 난 후 느슨해진 전립선에 대해 고민할 때에도, 손바닥에 감겨 붙은 두루마리 휴지를 내밀며, 나는 생각했지. 진화하고 있는 휴지의 결이 너무나 예의가 바르다는 것과 그러므로 적당히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거짓을 말하려 한다. 교복 입은 여자애로 밑을 닦아봤다고.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휴지는 숨기기 위해서만 역사하지. 역시나 나는 한번 흡수한 것들과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탐하고 싶었던 비밀들은 질서도 있고 굴곡도 있고, 우는 자에게 울음을 멈추라고 강요하는 힘! 그 힘도 있다. 나는 휴지에 대해 명상한다. 비밀의 끝은 늘 비어 있으므로 명상의 이유가 성립될 뿐이다.
—《시와반시》2009년 여름호
박성준 /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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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파악한 세상은 비밀투성이다. 어깨의 각을 세우기 위한 ‘뽕’ 대용으로 뭉쳐넣은 크리넥스 화장지, 그것만큼이나 알 수 없는 여자아이들의 세계. 현실은 뽑아도 뽑아도 계속 따라나오는 휴지처럼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뿐이다. 휴지를 풀었다 감으며 나는 조금씩 세상을 배워간다. 비밀도 진화한다는 것, 한결 더 공고해지고 치밀해진다는 것. 치밀한 그것들이 억압의 주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휴지처럼 흡수한 것을 잊어버리고, 알려고 하지 말고,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배운다.
비밀의 중심에는 누가 있나. 비밀을 만들고 유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두루마리 한 롤을 다 풀어도 실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된 바는 오히려 중심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다. 표면상 비밀의 주체는 없고 그것을 유포하는 세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루마리 휴지의 칸칸들처럼, 비밀은 모든 세상사의 틈에, 겹과 겹 사이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밀이 있고 억압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그것에 대해 계속 명상하는 것이다. 비밀의 끝은 늘 비어 있다. 투명한 속, 비어 있는 중심의 공포. 명상은 투명한 속을 가장하고 있는 억압의 메커니즘에 대항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문혜원(문학평론가, 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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