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진의 「고등어의 골목」평설 / 홍일표
고등어의 골목
이종진
저녁 찬거리는 고등어였다
살아온 날 만큼이나 무뎌진 식칼이
고등어의 푸른 등줄기를 몇 차례 내려치고
토막토막 나면서 오븐렌지 속에 들어가자
고등어는 결국 바다에서의 푸른 생을 끝냈다
한때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리
식솔들을 이끌고 바다의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밥을 찾아 끝없이 유영했으리
가끔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우연찮은 골목의 끝을 지나
배고픔을 달래며 다시 되돌아온 적도 있었으리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참으로 길었다
골목마다 끝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에 밀려
얼마 만큼인지 흘러가고 나서야 나의 서투른
귀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모처럼 고등어 찜을 해먹자며
푸릇푸릇한 등줄기를 토막 내며
새 칼을 하나 사든지 아니면 숫돌에서 갈아야 한다며
무뎌진 식칼을 아내가 내 앞에 쓰윽 내밀자
난 내심 뒤로 물러나며
이보다 더 무뎌지고 헐렁한 칼을 갈기 위해
품에 넣고, 오늘 이 골목 저 골목을
어쩌면 저 고등어만큼이나 열심히 흘러 다녔는지
하루 종일 떠다닌 골목을
거꾸로 토막토막 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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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득한 삶이 배어있는 시
그의 시는 정직하다. 요란한 수사도 얄팍한 기교도 없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소주 맛이 난다. 찌르르 공복의 위장을 훑고 지나가는, 소주의 투명한 빛이 그의 시다. 현실과 유리된 환상 공간을 유영하는 시도 아니고, 지루한 사설로 중언부언하는 시도 아니다.
최근에는 너도나도 산문시들을 들고 나온다. 방법론적인 자각 없이 덩달아 산문시의 대열에 합류한 시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있다. 저급한 산문시에는 숨을 곳이 많다. 사유가 깊지 않은 시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위장하기 좋은 곳이 산문시다. 뭔가 있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게 연막을 칠 수 있다. 그러나 연막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당사자들은 모른다.
그러나 이종진 시인의 정공법은 온갖 기교를 무색하게 한다. 이미 그는 손끝 재주의 얕은 수를 안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삶의 내용이 시의 형식과 작법을 결정지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시집 제목대로 ‘여기 아닌 그곳’을 꿈꾸며 산다. ‘그곳’은 ‘여기’의 부정이 아니라 ‘여기’의 질곡을 넘어서기 위한 시적 방편일 뿐이다.
‘고등어의 골목’에는 진득한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 고등어는 시인의 등가로서 고달픈 삶의 현장을 온종일 헤매고 돌아다니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시민의 슬픈 초상이다.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참으로 길었다’는 고백은 거친 세파에 밀려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가는 화자의 진솔한 내면 풍경이다. ‘무뎌진 식칼’을 들이미는 아내 앞에 ‘나’는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가장이고, ‘이보다 더 무뎌지고 헐렁한 칼을 갈기 위해’ 온종일 떠다닌 골목을 ‘토막토막 내보고’ 있는 쓸쓸한 중년의 사내일 뿐이다. 시 속의 화자는 삶의 변방을 떠돌며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 살아남고자 하는 내적 열망의 존재이다.
이 시는 ‘고등어’와 ‘무뎌진 칼’, ‘나’와 ‘아내’가 시적 긴장을 조성하는 요소이고, 공감의 진폭을 확장하는 질료이다. 단순한 일상의 서사로 끝날 수 있는 시를 절묘한 구도와 극적 요소의 도입으로 입체화하였다. 대부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형상화할 때 시는 평면성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1차적 수사로 어느 정도 시적 형상화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울림은 1회성으로 끝나기가 쉽다.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네 할 뿐이지 두 번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밋밋한 단층의 서사가 갖는 한계이다. 꽹과리의 얇은 소리와 징의 둔중한 울림이 다르듯.
이종진 시인은 어설픈 관념이나 표피적 감각에 기대지 않고 현실의 삶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리얼리스트다. 그는 현장의 고달픈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며 육화된 시를 쓰는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맑은 소주 맛이 나고, 징소리의 둔중한 울림이 있다.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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