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것이 어느 날 정반대의 것이 될 때 [2011.01.21 한겨레21 제845호]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철규의 시 ‘유빙’에서 형식을 이기는 진심의 단호함을 읽다
1월 첫째 주에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알다시피 지난 세기 초 러시아의 이론가들은 시란 일상어에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이고 당대의 언어 규범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면서 ‘낯설게 하기’야말로 문학성의 실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시는 일종의 창조적 변칙, 활력을 주는 언어의 질병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아파서 신체를 당연시하지 않게 될 때 신체를 새롭게 경험하는 반갑지 않은 기회를 갖는 것과 같다.”(테리 이글턴, <시를 어떻게 읽을까> 중에서) 이를 일러 흔히 ‘러시아 형식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누구도 ‘형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는데, 저와 같은 의미의 형식주의란 일종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을 때 흔히 느끼는 것은 저 ‘기본’에 대한 심사숙고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다. 시인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제 무능한 언어를 학대한 흔적이 없고, 언어가 시인의 통제를 벗어나 날뛴 축제의 흔적이 없다. 시인과 언어가 이렇게 서로 사이가 좋아도 되는가. 그러니 늘 모범답안처럼 보여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란 참 흥미로운 것이어서, 올해 당선작들 중에서 내 마음을 잠깐이나마 흔든 작품은, 그런 형식주의적 ‘기본’을 강하게 의식한 ‘학대’와 ‘축제’의 시가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해야 할 작품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신철규의 시 ‘유빙’(遊氷·<조선일보>)을 옮겨 적는다.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1~3연)
찻집에 한 연인이 앉아 있다. 이미 이별이 진행되고 있으나 그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 연인들이 ‘헤어져야 한다’와 ‘헤어질 수 없다’ 사이에서 주저하며 얼어붙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입김’(한숨)과 ‘눈물’도 모두 양가적인 의미를 부여받아 흔들린다. 그러던 중 ‘나’는 찻집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내다본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는 중이고 그 풍경 속에는 행복해 보이는 다른 연인들이 있다. ‘나’는 어쩌면 그 풍경에서 해답을 찾게 될까.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4~6연)
‘나’는 지금 창밖의 커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나선을 그리며 비상’하는 환각을 본다. 이별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그런 ‘나’의 마음의 현황을 보조하는 이미지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이 그런 것들이다. 각기 떠남, 무(無), 소멸 등의 의미를 머금고 있음을 알겠으되, 내게 이 이미지들의 호소력은 크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이어지는 7연을 읽고, 나는 이 시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7~8연)
시는 이렇게 쉼표를 찍고 끝난다. 이 연인들은 결국 헤어졌을까?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으깨버려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의 그 쓸쓸한 단호함에 마음이 흔들렸다. 형식주의가 요구하는 언어의 폭력, 반역, 변칙, 질병… 등이 이 시에는 많지 않지만, 그 대신 다른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진심이다. 입김은 찬 것을 녹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것을 식게도 한다. 눈물은 당신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당신을 얼어붙게도 한다. 사랑이 변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가슴을 치며 울고 싶어진다. 그 순간의 진심을, 이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은 무적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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