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묵집에서」감상 / 이진명, 최정란
묵집에서
장석남 (1965~ )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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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을 먹으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람 많을라나. 묵의 살 더없이 매끄럽고, 그 성질 잘 깨지고, 잘 미끄러진다고 여자를 연상케 하나. 그렇다면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해보는 사람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 많으리. 여자의 깨지기 쉬운 성질이 묵 같다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의 성질이 묵 같은 것일 테지만. 아닌 게 아니라 묵집에서 묵밥 좀 먹으려면 사람들 입 다물려 조용할 것은 같다. 묵 집어먹기란 조심스럽고 위태로운 작업이니까.
서늘한 사랑 아슬아슬 늘 조심스러웠으나 그만 깨져버리고. 씁쓸한 묵 지켜보는 묵집의 표정은 다시 사랑의 눈빛 고여 와 호젓해지고. 묵을 달콤하다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 시인이 누대로 물려받은 고졸한 천품(天稟)이 녹아 엷게 달콤, 달콤한 맛도 내준다.
이진명 <시인>
긴긴 겨울 밤, 간식 가운데 으뜸은 묵이었다. 오일장날 외할머니는 인편에 메밀묵이며 도토리묵을 한 양푼씩 보내셨다. 도토리묵은 골패쪽처럼 납족납족 썰고 미나리와 상추를 곁들여 깨소금과 참기름을 듬뿍 넣은 양념간장에 버무렸다. 메밀묵은 곱게 채를 쳐서 뜨거운 국물을 부어 먹으면 일품이었다.
묵은 미끄러워 젓가락으로 집기 어렵다. 어렵사리 집어 올려도 미꾸라지처럼 젓가락 사이를 빠져 나간다. 살이 부드러워 살짝 잡아도 뚝뚝 끊어지기 십상이다. "매끄러운, 떫고 씁쓸한 뒷맛, 아슬아슬한, 조심스러운, 위태로운, 깨져버린," 이 수사들은 묵과 사랑의 교집합이다. 햄버거와 치킨과 피자 배달 오토바이의 굉음에 밀려, 환청처럼 들려오는, 메밀묵 사려!
최정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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