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구식의 「조용한 물」감상 / 이진명
조용한 물 —G선생께
원구식 (1955~ )
당신이 제게 준 빵에 대하여 그 빵이 탕아에게 일으킨 기적에 대하여 당신이 준 에덴산성에 대하여 에덴의 짙은 안개와 눈꽃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천사들에 대하여 은전 삼십에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를 당신의 막대기로 쓰시는 까닭에 대하여
나는 쓰지 않으면 안된다. 부활의 첫 이삭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선생님, 저는 사납고 강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거치른 폭력이나 세상을 일순간에 정지시키는 전쟁을 좋아했습니다. 거대한 배를 가라앉히는 폭풍이나 해일을 좋아했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은 이렇게 끝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저에게 밥과 빵과 휴식과 안락을 주었습니다. 아, 그러나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요. 화염병이, 달콤한 선동이 저 엄청난 폭풍이, 위대한 정치가가 세상을 부활시키는 것은 아니지요. 전쟁이, 태풍이, 화산의 용암이 휩쓸고 간 세상을 파랗게 물들이는 것은 조용한 물이지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조용한 물들이 밥과 빵과 휴식과 안락을 주지요.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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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들려 있다. 무한 세계살이로 과열돼 있는 신민. 자연스러움과 조용함은 폐기처분됐다. 올 3월은 전쟁과 지진, 원전폭발 등의 대재앙으로 더욱 들렸다. 시의 진술처럼 당연히 한 개성으로 특별히 사납고 강한 것을 좋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 진짜 전쟁과 해일, 화염병 따위가 휩쓰는 세상을 좋아하겠는가. 시인이 사납고 강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나름 성찰하고 ‘파란 조용한 물’을 부르는 아름다운 일. “세상을 파랗게 물들이는 조용한 물”이 절실히 필요한 계절.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조용한 물”이 드디어 ‘G선생께’ 드리는 편지 시로 오늘 찾아왔다. 우리는 소생할 것이다.
이진명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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