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의 「하늘 벤치에서」감상 / 이진명
하늘 벤치에서
조정권 (1949 ~ )
거북이연립주택 옥상에는 찬장, 내다 버린 장롱,
스티로폼 조각, 부서진 싱크대들이 두엄처럼 쌓여 있다.
오리집 철망도 올라가 있다. 호박밭과 토마토 화단도 올라가 있다.
1인용 벤치도 있다. 그 벤치엔 트럼펫 부는 남자가 한여름 런닝 차림으로 산다.
남자가 쌓아 놓은 소주병 주위로 흙을 수없이 물어다 나른 빗방울들.
민들레 꽃씨가 날아와 커 가다가 염천에 삭아 버렸다.
오이꽃도 녹아 버렸다.
가끔 옥상에 빨래를 내다 거는 남자가
틀어 놓은 수돗물이 넘치는 걸 보았다.
그때마다 오리들은 울부짖었다.
오리들은 트럼펫 소리를 어미처럼 따라다녔다.
어느 겨울 밤 트럼펫 부는 남자는
집 앞에서 봉고차에 치여 누런 연탄재의 골을 쏟고
반듯하게 누운 채 실려 나갔다.
갈 곳 잃은 오리들은 어디론가 날아볼 시간을 두리번거리다
옥상에 도로 주저앉았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이었다.
오리들은 쭈그러진 나팔을 주둥이처럼 내밀고
무슨 음표같이
옥상에 모여
낮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헐벗은 눈발을 올려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깃털 다 뜯긴 채 내려오는 눈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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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하늘 벤치엔 하늘의 1인 하나님이 사네. 런닝 차림으로 트럼펫 불며. 그 하나님 봉고차에 치여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셨네. 갈 곳 잃은 오리들 같이 따라 날지 못하고 옥상에 도로 주저앉았네. 지상에 주저앉은 우리들처럼. 일찍이 깃털 다 뜯겨 옥상에 올라 헐벗게 산 하나님, 그래도 오리랑 토마토 화단 가꾸며 재미롭게 사셨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에는 역시 깃털 다 뜯긴 눈발로 오리랑 우리들 보러 내려오시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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