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골목에서
강윤후
햇빛이 흐르는 대로 길이 트인다
나는 술래라도 된 듯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어린 날의 기억들은 꼭꼭 숨어 버려
머리카락조차 들키지 않고
블록 담벼락은 글자가 씻겨 나간 필사본 같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비가 이 골목을 지나갔을까
내 오래된 수첩도 젖고 마르기를 거듭하여
막다른 기억들로 얼룩져 있다
지워진 글자를 판독하듯
담벼락에 손바닥을 얹고 걷는다
차단된 세월의 저편에서 다른
손바닥이 담벼락을 쓸며 지나간다
나는 누군가와 손바닥을 맞댄 채 걷는다고
상상해 본다 문득 햇빛이 흐름을 멈춘다
모르는 글자들이 손바닥을 통해
몸 안 가득 주입된다
나를 따르던 그림자가
내게서 손을 떼고
저 혼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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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후 62년 서울 출생, 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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