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의 「안쪽」 감상 / 이진명
안쪽
류근 (1966~ )
동네 공원에 저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앞세우고 와서
한나절 새우깡이나 비둘기들과 나눠 먹다가 어머, 어머, 어머낫!
그새 발목까지 흘러내린 엉덩이 추켜올리며
새우깡 알맹이 부스러지듯 흩어져 집으로 향하는
저 여인들 또한 한때는 누군가의 순정한 눈물이었을 테고
지금껏 지워지지 않는 상처일 테고
세상에 와서 처음 불리어진
첫사랑 주홍빛 이름이었을 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살을 에는 무엇이었을 테지
여인들 떠나고 꾸룩 꾸루룩,
평생 소화불량 흉내나 내는
비둘기마저 사라져버린 공원에 긴 졸음처럼 남아서
새우깡 봉지와 나란히 앉아 펄럭이는 내 그림자 곁으로
오후의 일없는 햇살 한 줌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새우깡 빈 봉지의 안쪽 살갗이
저토록 눈부신 은빛이었다는 걸
처음 발견한 내 눈시울 위로 화들짝 꽃잎 하나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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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원에 든 상처와 자조의 냄새 두른 사내. 던져주는 새우깡 잘 받아먹는 비둘기 ‘꾸룩 꾸루룩, 소화불량 흉내나 낸다’고 괜히 비아냥이고, 공원에 홀로 남겨진 제 꼴은 ‘긴 졸음처럼’이라고 술 덜 깬 투로 말한다. 2연 여인들에 대한 비탄 어린 문장들은 또 어떤가. 사랑, 뭐 그런 것에 살을 에어봤나 싶고. 사내는 늘 안쪽의 무엇이 그리웠나 보다. 마침내 흔하게 대하던 ‘새우깡 빈 봉지의 안쪽 살갗이 눈부신 은빛’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을 보면. 꽃잎 떨어지는 데가 ‘눈’이 아니고 ‘눈시울’인 것은 환희(구원)의 빛이란 내부를 먼저 녹여 뜨거운 물. 눈물을 돌게 하기 때문.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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