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감상 / 이진명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이선영 (1964~ )
이 작은 포도알 속에도
몇 개의 딱딱한 씨가 들어 있다
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 있다
입안에서 터지는 이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
그냥은 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씨가 맺혀 있다
이 달콤한 포도알을 굴리거나 누르며 지그시 씹을 때도
절로 생겨나 거저 여물 리 있겠느냐는 듯
난자이며 정자인 씨가 혀에 걸린다
손길만 닿으면 건들건들 떨어져내리는 포도알 하나에도
돌부리처럼 걸려 넘어지는 옥니박이 씨가 숨어 있구나!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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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열매들이 있을라. 시인은 다시 알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고. 다시 안 것의 강조를 위해 동일한 것의 첨가를 뜻하는 보조사 ‘도’가 ‘포도알 속에도’의 ‘도’로 붙여졌다.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어떤 결심인 양 씨가’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씨가’ 박혀 있다. 하잘것없이 작고 여려도 다 ‘제 생의 응집’을 꼭 물고 굴렀던 것. 혀에 걸리는 이 포도씨 같은, 각자가 생에 박은 옥니 같은 것이 미래를 간다. 그 성질 딱딱하지만 둥글게 둥글게 부풀어 작거나 큰 달콤한 세상 만든다. 씨는 사랑이었던 것이고 미래는 그 사랑이 도착하는 곳이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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