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문학 참고서재

한혜영의 「트렁크가 트렁크에게」평설 / 홍일표

by 솔 체 2017. 8. 20.

한혜영의 「트렁크가 트렁크에게」평설 / 홍일표

 

 

트렁크가 트렁크에게

 

   한혜영

 

 

지겨운 나를 개 끌 듯 끌고 어디든 갈 수는 없나

해골만 달랑 넣은 트렁크 덜덜거리며 끌고

유럽으로 간다던 802호 트렁크 부부를 엘리베이터서

본 적이 없나 당신은 일탈, 이탈도 할 줄 모르나

 

나를 끌고는 대한민국으로밖에는 갈 줄을 모르는 당신

내 뱃속에 꾸역꾸역 선물 옷가지나 챙겨야 되는 줄로 아는

반세기를 살고도 아직도 고지식한

부부싸움을 하고도 집 바깥으로 나간 적이라고는 없는

 

그 쪼그라진 쓸개랑 간이랑 내장 훌훌 나한테 쓸어 담아

덜덜거리며 끌고 갈 수는 없나

없으면, 내가 당신에게로 들어갈 수는 없나

인간 트렁크인 지퍼 망가져 쉽게 열리지도 않는

 

트렁크 안에 트렁크

트렁크 안에 트렁크

뚜껑 열기가 그렇게 어렵나 어지간해서는

내가 당신을 열 수 없는 것처럼, 망가진

 

-------------------------------------------------------------------------------------------------------------------

 

삶의 궤도와 일탈

 

 

   시 속의 남자는 일탈을 모르는 사내입니다. 유럽도, 아프리카도 꿈꾸지 않는 자로 잰 듯 정확한 사람이지요. 한 눈 팔지 않고 생활에 매우 충실한, 한 발자국도 옆으로 비켜서지 않는 오직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는 그런 사내인 듯합니다.

   50년을 함께 살고도 아내를 선물 옷가지나 챙기면 되는 존재로 생각할 뿐입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한없이 답답하고 고지식하게만 보입니다. 부부싸움을 하고도 집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는 그런 사내입니다.

   긴 세월 동안 쪼그라진 쓸개랑 간이랑 내장, 다 쓸어 담고 어디론가 훌쩍 떠났으면 싶지만 사내는 생활의 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습니다. 아내는 탄식합니다.

   “뚜껑 열기가 그렇게 어렵나”

   지퍼가 망가져 이제 열리지도 않는 트렁크 앞에서 아내는 절망합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시인은 무엇을 보는 것일까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뱅뱅 도는 일상의 저 쓸쓸한 삶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는 태양과 뭇별들의 안주와 절망을 시인은 보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에 획을 긋는 별똥, 그 대자유의 황홀을 시인은 꿈꾸고 있습니다. 오늘 밤 차가운 하늘에 단호하게 획을 긋는 별, 그 아름다운 자유의 투신을 볼 수 있을는지요. 풍수학자 최창조의 『도시풍수』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껏 나는 너무 규칙에만 매달려 왔다. 예외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 자신을 편협하게 만들었고, 교조적 풍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최창조 교수의 진솔한 고백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그의 고백처럼 우리도 갖가지 규칙과 관습, 딱딱하게 굳어버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대자유의 광활한 초원을 내달리지 못하고, 삭막한 일상의 틈바구니에 끼어 허덕허덕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요. 교조적 삶에 스스로 갇혀 사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메마른 사막을 지친 낙타처럼 걷고 있는 건 아닌지요.

   한혜영 시인은 이민 초기에 낯선 이국의 땅에서 혼자 시를 읽고 배우며 팍팍한 일상을 견뎌왔다고 합니다. 잠을 자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꿈속에서도 자판을 두들기고 문장을 수정하며 글을 썼답니다. 그런 열정이 좋은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시인은 오늘도 꿈을 꿉니다. 일상의 쓸쓸함을 견디고, 뛰어넘는 방법을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일탈은 삶을 새롭게 하고, 청신한 기운으로 곤고한 삶의 날개를 퍼덕이게 하지요. 부디 질주하는 야생마의 거친 숨결과 자유의 광활한 지평을 포기하지 마시길!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