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감상 / 김선우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최승자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게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게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게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어드릴게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드릴게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게요.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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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 1952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으며,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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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연애시들 중 가장 처연한 시입니다. 바스러진 벚꽃들이 바람에 쓸려 사라져버린 나무 밑에서 이 시를 읊조립니다. 어투는 발랄하지만 이 발랄함은 ‘저무는 산 그림자’의 길고 고적한 쓸쓸함을 품고 있습니다. 봄에는 누구나 연애하고 싶어 달뜹니다. 연애하고 싶어 달뜨는 이 뜨거운 마음은 생의 불연속성에 대한 우리 나름의 안간힘이기도 할 겁니다. 피해갈 수 없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 있어 우리는 더욱 달뜹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 열렬해집니다.
사랑의 숙명이면서 존재의 숙명이기도 한 불연속하는 생의 마디를 시인은 이렇게 이어놓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라도 뭇별들 사이에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 드리겠노라’고. 아, 오늘의 사랑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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