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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명시들

휴전선 (외 2편)/박봉우

by 솔 체 2019. 7. 13.

휴전선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황지荒地의 풀잎

 

박 봉우

 

 

언젠가는 터져야 할

나의 革命 앞에서

나는 귀여운 잠꼬대를 한다

하나하나 저금통에 넣은

여러모의 얼굴들이

자기와 自由를 찾을 때

장엄한 旗발은 휘날리고

엄청난 행진곡은 시작되는 것

누구를 위해서 죽을 순 없다

나를 위해서도 죽을 순 없다

녹슨 鐵路 위에

무성한 잡풀들의 鐵路 위에

나의 사랑은 빗발쳐야 하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을

용서받을 순 없다

사형대 위에 사라지는 목숨일지라도

나의 어머니와 祖國과

사랑의 손이 있는 것

언젠가는 터져야 할

나의 묵중한 革命 앞에서

목이 마른 荒地의 풀잎

목이 마른 荒地의 太陽

내가 사는 땅이 있는 한

험악한 길과 가시길이라도

더욱 굳건한 의지와 신앙으로

나는

나의 荒地에

조그만 풀잎의 욕심으로

革命을 모독하고

더욱 사랑하련다

革命의 아침을...

 

 <1970 詩人>

 

ㅡ창작과비평사 창비시선5 '박봉우 시집'ㅡ

 

 

아리랑고개의 할미꽃

 

박봉우

 

 

우선 술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루 담배 서너 갑은 피울 줄 알아야 한다
란 앞에서 서예도
한 줄 쓸 줄 알아야 이야기가 된다
비워 놓은 집에
도둑이 기웃거려도
원만할 줄 알아야 한다
바둑 한 수에도 잠 못 이루는
그러한 위인이어야 한다
겨울 밤에 봉창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만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친구가 찾으면
우선 술잔을 차릴 줄 아는
그런 그런 사람이어야 하고
내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어야 한다
비를, 비를 맞으며
선창가에서 들려오는
막소주집 유행가에는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흰 고무신보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
조선 조끼 옷을 입을 줄 아는
그런 이여야 한다
목화 따는 여인 앞에
이글이글거리는 햇빛 속에
지글지글 끓는
된장국의 맛을 아는
아리랑고개의 할미꽃이어야 한다.
황토흙에 뱀이 혀를 널름거리는
숨막힘 속에
바위보다 더한 의지가 넘치는
그런 꽃이어야 한다
장작개비를 지게에 짊어지고
황소 같은 땀을 흘려야하는
그런 이여야 한다
서럽고 서러운 가슴통에
불길이 타오르는
오직 불길이 타오르는
수없는 밤을
쑥잎 같은 향내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해바라기보다 짙은 머리여야 한다.

 

 

박봉우(朴鳳宇, 1934.7.14∼1990)  

광주(光州) 출생. 호는 추풍령(秋風嶺). 전남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대학 재학시 <영도(零度)> 동인이었으
며,1952년 {문학예술}에 <석상의 노래> 당선.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
했다. 그 뒤 <나비와 철조망>(1956) <눈길 속의 카츄사>
(1957) <과목(果木)과 수난>(1957) 등을 발표하여 시단
의 주목을 받았고, 첫시집 《휴전선》(1957)에 이어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1959), 《4월의 화요일》(19
62), 《황지(荒地)의 풀잎》(1976), 《서울 하야식(下野
式)》(1985), 《딸의 손을 잡고》(1987), 《나비와 철조
망》(1991) 을 간행하였다.1958년에 전남문화상 수상.
1962년 제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62년 이후에는 <신춘시(新春詩)>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1962년에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선적(禪的)인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서정세계를 추
구했으며, 그 서정을 통하여 문명비평을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 작품집으
로 《황지(荒地)의 풀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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