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紫霞門) 밖
김관식
나는 아직도 청청이 어우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자기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구을러 흐르듯 살아가면 앞길은 열리기로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산(山)마을 어느 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여름 햇살이 얼음처럼 여물어 쏟아지는 과일밭.
새카맣게 그을은 구리쇠빛 팔다리로 뺨을 적시고 일을 하다가 가을철로 접어들면 몸뚱아리에 살오른 실과들의 내음새를 풍기며 한번쯤 흐물어지게 익을 수는 없는가.
해질 무렵의 석양 하늘 언저리
수심가(愁心歌)같이 스러운 노을이 떨어지고 밤그늘이 덮이면 예저기 하나둘씩 초록별이 솟아나 새초롱한 눈초리로 은근히 속삭이며 어리석음을 흔들어 일깨워 준다.
수줍은 달빛일래 조촐하게 물들어 영롱히 자라나는 한그루 향나무의 슬기로움을 그 곁에 깃들여서 배우는 것은 여간 크낙한 기쁨이 아니라서 스스로의 목숨을 곱게 불살라 밝음을 얘기하는 난 한낱 촛불이 열두폭 병풍 두른 조강한 신혼초야 화촉동방에 죽음을 기다리며 구름속에 파묻혀 기러기 한백년을 이냥 살으리로다.
사슴
김관식
저는
사슴이에요.
저의 뿔을
사람들은 탐내지요.
몸에 좋다고
제 뿔을
뽑아 가
가지를 뻗을 수 없어요.
다른 숲 속 친구들처럼
예쁜 가지를 뻗고 싶어요.
절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저는
순한
사슴이어요.
초야(初夜)의 기도(祈禱)
김관식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면
어느새 땅거미가 짙어 오나니
아내야
초롱에 불을 밝혀라
서울 변두리 조그마한 방에서
맡은 일을 개운히 해버리자고
낡은 책작을 제껴가면서
아득한 옛날 향기를 맡고 있노라는데
독수리 날개 같은 바람이 와서
초롱을 차고 달라나는 것 허지만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하다못해 저승에라도 자리를 옮겨
죽은 사람의 하얀 이마를
조용한 빛으로 밝혀 주리라
임이여.
가난한 우리들은
모두 어디로든지 가고 싶어 하니
당신의 심부름꾼 바람이 와서
초롱을 앞세우고 떠나가듯이
하루속히 저희에게도 길을 열어 주셔요.
病床錄
김관식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肝, 心, 脾, 肺, 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 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보다.
< 김관식 [金冠植, 1934.5.10 ~ 1970.8.31] 약력>
* 시인.
* 호 : 우현(又玄)
* 출생지 : 충남 논산
* 동국대학교 농대 4년을 중퇴
* 1952년에 시집 《낙화집(落花集)》을 발표하였고 1955년에 《현대문학(現代文學)》을 통하여 시《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근처(紫霞門近處)》 등이 추천되어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
* 서울상고 교사, 《세계일보(世界日報)》 논설위원 등을 역임
* 4·19혁명 후에는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된 후 병고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요절함
* 어려서 한학과 서예를 익히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배웠기 때문에 동양인의 서정세계를 동양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특이한 시풍을 이룩함
* 심한 주벽(酒癖)과 기행(奇行)으로 많은 화제를 낳기도 하였으나, 동양인으로서 투철하려고 한 몸부림은 시와 인간에 특유의 체취를 풍기게 함
* 주요작품 : <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근처(紫霞門近處)>등
* 시집 : 《낙화집(落花集)》 (1952), 공저(共著)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1955), 《김관식 시선》(1956)
* 기타 저서 : 번역서로 《노당한시존 (老棠漢詩存)》
* 시비 : 모교인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교정
* 묘소 :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마을 입구
◀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들과 닭을 잡아먹기도 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면과 한판 붙기도 하고, 허위와 썩은 가식이 판을 치는 문단행사에 나가 깽판을 치기도 하고, 서정주 집에 가서 한번 보고 반한 그의 처제와 결혼을 하겠다고 자살기도를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기인. 그러나 그의 시는 하나같이 기개가 높다. 그의 기개에 비하면 요즘의 시인들은 너무도 얌전하다. 시인정신은 다 썩었는가. 팩 곯아버렸는가.
그는 말년에 불운했다고 한다. 이 시는 아마 그때 쓰여진 시 같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그려지는 이 애잔하고 애틋한 것들, 삶과 죽음, 그리고 아, 다가올 새벽. 그는 기약 없는 새벽이 두려웠던 것이다. 절망과 가난, 내일 없는 불안이 수시로 교차하는 이 시는 한 시대의 우울한 음화(陰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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