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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명시들

청자수병(靑磁水甁) (외 2편) / 구자운

by 솔 체 2019. 7. 13.

청자수병

구자운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가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프름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 지은 달이라커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려진 운학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어!
오, 저어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우리들은 샘물에

 

구자운

 

 

저물녘 흥청대는 이끼를 뜯으면서

우리들은 샘물에 씻기는 해골일 걸세.

소금인 양 흰 덩어리 이루어

아늑한 깊은 수풀의 길표 옆에서.

점백이 뱀이 움틀거린다.

전엔 희망이었을 엷은 눈을 뜨고서

반역의 바위를 물어뜯을 때,

우리들은 꿈꾸느니, 어슬녘의 파선을,

검은 절망의 물결 드높이

벼락불의 축복을 가져오며,

허무의 고요가 기슭으로 밀려닥침을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이 어머니의 오장을 꿰뚫음을,

캄캄한 어둠에서 아침이 태어남을,

노여움이 아니고 배의 키바퀴도 아니고,

영롱한 맑은 숨결로 엉긴

소리들이 날개 이루어 파닥거려 옴을.



우리들은 밤잠에 잠기는

썩어 버린 관 속의 해골일 걸세.

빗물인 양 내리는 나뭇잎의 입맞춤에 덮인,

그리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있는 야심 없는 꽃,

묻혀서 보이진 않지만 가장 뚜렷한

작은 거울 쪽.

 

 

 

벌거숭이 바다

 

구자운

 

비가 생선 비늘처럼 얼룩진다

벌거숭이 바다

 

괴로운 이의 어둠 극약(劇藥)의 구름

물결을 밀어 보내는 침묵의 배

 

슬픔을 생각키 위해 닫힌 눈 하늘 속에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바다, 불운으로 쉴 새 없이 설레는 힘센 바다

거역하면서 싸우는 이와 더불어 팔을 낀다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선다

말없는 입을 숱한 눈들이 에워싼다

술에 흐리멍텅한 안개와 같은 물방울 사이

 

죽은 이의 기(旗) 언저리 산 사람의 뉘우침 한복판에서

뒤안 깊이 메아리치는 노래 아름다운 렌즈

흰옷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바다

 

 *구자운의 유고시집 <벌거숭이 바다>의 표제시로서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두드러진 현실고발의 시

   정신을 담고 있다는 평이다.  삶의 아픔이 상징적으로 무거운 이미지로 침통하게 표현되고 있다.

 

 

 

 

*구자운(具滋雲, 1926~1972) 부산(釜山)출생의 시인

     동양외국어전문대학 노어과 수료

  《현대문학》에 시 <균열>(1955), <청자수병>(1956), <매(梅)>(1957)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

  1959년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60년대 시화집》 동인

     시집으로 <청자수병>(1969), <벌거숭이 바다>(1976)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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